[진희영의 일본 후지산 등반기] 오직 산과 나만이 존재하는 시간 속 비경
[하] 최고봉 겐가미네에 서다’ 가파른 산비탈 등 아랑곳 정상 향한 간절한 발걸음 日 최고봉 정복 가슴 벅차 검붉은 화산암·분화구 등 웅장한 자연 ‘최고 선물’
# 9합목(만넨유키 산장-만년설 산장) 도착
9합목과 오쿠미야 신사가 있는 구간 역시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거대한 기차 모양의 바위를 지나고, 후지산의 거대한 분화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점을 통과하면 비로소 정상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새벽 2시, 해발 2,325m의 세이칸소(星觀莊) 산장을 출발한 지 어느덧 6시간. 고된 사투 끝에 오쿠미야 신사가 자리한 9합목에 도착했다. 이곳은 정상(10합목)을 불과 20여 분 앞둔 해발 약 3,450m의 능선이다.
신사 앞에는 ‘후지산 본궁 센겐대사(富士山本宮淺間大社)’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우뚝 서 있다. 모양만 보면 정상 표지석처럼 보여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후지산 정상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뒤 하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후지산의 진정한 정상은 이곳에서 약 20분을 더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더욱 가팔라진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하나의 길을 함께 이용하다 보니 곳곳에서 병목현상이 생기고, 때로는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몇 분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뵜다. 아래쪽 산비탈에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줄지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 모습은 마치 검은 화산암 위를 개미 떼가 한 줄로 기어오르는 듯 장관을 이뤘다. 정상을 향한 사람들의 간절한 발걸음은 모두 하나의 긴 행렬이 돼 후지산 능선을 수놓고 있었다.
# 日 가장 높은 산, 겐가미네봉에 서다
마침내 정상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산행 내내 날씨는 맑았고, 정상의 풍경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선명했다. 정상 표지석 앞에 서는 순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숨은 거칠게 차오르고 두 다리는 무거웠지만, 구름 위로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그동안의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 하늘과 가장 가까운 해발 3,776m겐가미네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순간만큼은 오직 산과 나만 존재하는 듯했다. 아마도 이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뒤 후지산의 거대한 분화구로 향했다. 분화구 둘레는 약 2.3㎞로 한 바퀴 도는 데 약 1시간이 걸린다. 천천히 걸으며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검붉은 화산암과 깊은 분화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은 후지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한 풍경이었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설 수 있을까.'
짧은 물음을 마음속에 남긴 채 하산길에 올랐다.
하산은 8합목부터 시작된다.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분리돼 있어 이동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화산석과 잔자갈이 모래처럼 깔려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러지기 쉽다. 특히 발목과 무릎에 부담이 커 방심은 금물이다. 오를 때는 약 6시간 30분이 걸렸지만, 하산은 스바루라인 오합목까지 약 3시간이 소요됐다.
등정 6시간 30분, 분화구 순례 1시간, 하산 3시간. 총 15㎞의 여정을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었다. 그것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자연과 자신을 마주하며 한 걸음씩 써 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혼자 걸을 때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의 여행가이자 사상가인 서하객(徐霞客)의 『서하객유기』 서문에는 ‘스스로를 물외(物外)에 두고 세속의 번다함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참된 유람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후지산을 오르며 이 두 사람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산은 누구에게나 같은 길을 내어주지만, 정상에서 무엇을 얻어 돌아가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정복의 기쁨을, 누군가는 자연의 위대함을, 또 누군가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얻는다.
이번 후지산 산행은 필자에게도 단순히 일본 최고봉을 올랐다는 기록 이상의 의미로 남았다. 세속의 번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자신과 마주했던 시간, 그것이야말로 이번 여정이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끝)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