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매일통신] 누가 박상진 총사령의 공적을 조작했나
올해 광복절 행사서 사라진 박상진 추모행사 부활 서훈 바로잡기 나서 왜곡된 서훈 바로잡아 재평가 해야
처서가 지나도 염천이다. 울산의 8월은 뜨겁다. 광복이 있고 망국도 함께한 8월이지만 울산의 8월은 고헌 박상진 총사령의 순국일도 함께한다. 지난주 울산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상진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공연이 사라졌다. 박상진 뮤지컬은 왜 광복절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을까. 몇해전부터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박상진 의사의 독립운동 서훈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다. 박 의사의 서훈은 3등급이다. 1921년 8월 항일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영남권 사형수 1호로 희생된 박 의사는 왜 3등급의 서훈을 받았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은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시기에 2,700여 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시행됐다. 서훈은 시작됐지만 박정희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의 혼을 불살랐던 이들에 대한 추모의 의지가 낮았다. 1990년 상훈법 개정으로 서훈의 등급이 세분화됐다. 1등급이 대한민국장이고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등 7등급 체제로 순서를 나눴다. 이 때의 기준은 철저한 사료중심이거나 고증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의 평가 기준을 근거로 했다. 그 기준점은 자유당 정부 시절에 어설프게 만들어진 독립유공자 서열이었다. 친일인사의 대거 등용과 남로당과의 극한 대립이 점철된 자유당 정부의 독립유공자 등급 조정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바로 박상진 의사와 자유당 실세였던 장택상의 악연이다. 장택상은 해방직후 이승만에 발탁돼 경찰청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은 영남의 부호였고 친일인사였다. 장승원은 박상진 의사가 총사령으로 있던 대한광복회 조직원들에 처단됐다. 장택상은 자유당 정권의 최고 실력자로 있을 때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나오면 "내 아버지(장승원)가 어떻게 죽었는데"라는 말을 꺼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의 바탕이 장택상이 자유당 권좌에 있을 때 만들어졌고 박정희 군사정부 이후 공포된 것을 미루어 볼 때 박상진 의사의 서훈이 왜 3등급인지는 짐작할 만하다. 박 의사가 부사령으로 임명했던 김좌진은 서훈 1등급이다.
"일본 사람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동포를 죽이는 애국투사가 있겠는가. 박상진을 애국투사라고 말할 수 없으며 판결문에 기재된 대로 살인강도에 불과하다"
장택상의 딸 장병혜의 발언이다. 장병혜는 미국으로 유학을 간 초창기 유학파 역사학자다. 그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저서에서 대한광복회를 ‘떼강도 집단’, 박상진 의사를 ‘파렴치한 살인강도’로 서술했다.장병혜는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아시아 역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사람이 침략자의 법과 독립된 국가의 역사를 구분하지 못했을까. 몰랐다면 무지이고 알고도 썼다면 왜곡이다.
일제의 법으로 독립운동을 재판하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범이 되고 윤봉길 의사는 폭탄범이 된다. 나라를 되찾겠다며 산으로 간 의병은 폭도가 되고, 목숨을 걸고 군자금을 모은 독립군은 강도가 된다. 침략자의 판결문을 역사의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는 순간 독립운동가는 피고석에 앉고 친일 부역자는 억울한 피해자로 둔갑한다.
장병혜의 역사 왜곡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그 뿌리를 따라가면 박상진 의사와 장택상 집안 사이에 얽힌 한 세기 전의 악연을 만나게 된다. 박상진 의사의 스승은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 의병장 왕산 허위였다. 허위는 1908년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 경북 선산으로 모셨고 묘막을 지어 상복을 입었다.
허위에게 관직을 청탁한 인물이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었다. 장승원은 관직을 얻는 데 필요한 거액을 가지고 허위를 찾아갔다. 청렴한 허위는 이를 물리치려 했지만 제자 박상진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의병을 일으킬 군자금으로 쓰자고 제안했다. 허위는 당장 돈을 받지 않고 훗날 국난이 닥치면 내놓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장승원을 추천했다.
문제는 허위가 순국한 뒤였다. 허위의 죽음을 알게 된 장승원은 약속을 덮었다. 약속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 박상진은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뒤 장승원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장승원은 이를 거부하고 일제 경찰에 밀고했다. 대한광복회는 그를 민족반역자로 규정했고 채기중을 비롯한 단원들이 장승원을 처단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 사이에 얽힌 악연의 실체다.
박상진 의사는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장승원을 처단한 것이 아니다. 대한광복회는 부호들에게 먼저 군자금 지원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일경에 밀고한 친일 부호를 처단했다. 처단 뒤에는 대한광복회의 행위임을 알리는 포고문도 남겼다. 개인의 재물을 탐한 강도가 아니라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의열투쟁이었다.
장택상의 딸은 대한광복회와 박상진 의사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아버지 장택상의 원한이 딸 장병혜의 역사 왜곡으로 이어졌다. 한 집안의 사적인 원한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훼손했다. 역사는 이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울산이 주목해야 할 문제가 박상진 의사의 서훈이다. 박상진 의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3등급이다. 판사라는 안온한 미래를 버리고, 전국 조직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총사령을 맡고, 만주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조달을 지휘하다 일제에 붙잡혀 사형당한 인물이다.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세워 만주 독립군 양성의 책임을 맡긴 사람도 박상진이다. 이런 인물에게 3등급 독립장은 과연 합당한가.
8월의 울산은 박상진 의사를 기억한다. 그는 식민지의 판사로 살기를 거부하고 독립전쟁의 총사령으로 죽었다. 울산이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이유다. 서훈은 죽은 이에게 달아주는 장식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국가가 어느 편의 역사를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지다. 박상진 의사의 서훈을 바로잡는 일은 한 독립운동가의 계급장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일제의 판결문을 걷어내고 독립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