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67년 된 정원의 진화…큐가든은 지금도 미래를 심는다
[기획_전국 순회형 K-BUGA, 정원도시 울산 미래 열다] ⑥왕실 식물원서 기후·생물다양성 연구기관으로 ‘큐가든’
런던 중심부에서 디스트릭트 라인(District line)을 타고 서쪽으로 30여 분. 빽빽하던 건물 사이로 나무가 늘어나고 낮은 주택가가 나타났다.
‘Kew Gardens’.
역에 내려 계단을 빠져나오자 예상했던 관광지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대형 주차장이나 관광버스 대신 카페와 작은 상점, 붉은 벽돌집이 이어졌다. 가장 가까운 빅토리아 게이트(Victoria Gate)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세탁소도 꽃집도 ‘Kew Gardens’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큐가든이 이미 지역의 이름이자 정체성이 된 것이다.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도시가 사라졌다
빅토리아 게이트를 통과하자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넓은 잔디와 거대한 나무가 시야를 채우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여러 갈래로 뻗었다.
132㏊, 약 40만평(태화강국가정원의 약 1.58배) 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왕립식물원 큐(Royal Botanic Gardens, Kew)다.
1759년 왕실 식물원으로 시작한 이곳은 세계의 식물을 모으는 식물원을 거쳐 지금은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위기에 대응하는 연구·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180년 된 온실, 아직도 ‘현역’
길을 따라가다 큐가든을 상징하는 팜하우스(Palm House)와 맞닥뜨렸다. 1844~1848년 건설된 빅토리아 시대의 유리온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런던의 여름열기로는 견줄수 없는 훨씬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야자와 소철류가 머리 위까지 치솟아 있었고, 계단을 올라 높은 통로에서 내려다보니 잎사귀들이 온실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곳은 열대식물을 전시하는 쇼룸만은 아니다. 희귀·멸종위기 식물을 보전하고 연구하는 ‘살아 있는 실험실’이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1860년대 건설을 시작해 19세기 말 완성된 현존하는 빅토리아 시대 유리온실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이자 최초로 탈탄소화된 템퍼레이트 하우스(Temperate House)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 온대지역 식물 약 1,200종을 보유하고 있는 이 곳은 2013년부터 5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복원한 뒤 2018년 다시 문을 열었다. 유리창만 1만 5,000장을 갈아 끼웠다고 한다. 어떻게 고쳐 다음 세대까지 사용할 것인가가 먼저였다.
#한 건물 안에 ‘열 개의 기후’를 만들다
프린세스 오브 웨일즈 온실(Princess of Wales Conservatory)은 현대 큐가든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1987년 문을 연 이 온실에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10개의 서로 다른 기후구역이 들어 있다.
건조한 사막의 선인장과 다육식물부터 열대 난초와 식충식물, 수생식물까지 한 건물 안에서 만난다.
몇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가 달라진다. 건조한 공간을 지나면 습하고 무거운 열대 환경이 나타난다.
식물뿐 아니라 그 식물이 살아갈 환경까지 함께 보전하는 셈이다.
2006년 문을 연 데이비스 알파인 하우스(Davies Alpine House)는 반대의 방법을 택했다.
고산식물은 강한 햇빛과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곳은 많은 에너지를 써 온실을 덥히기보다 건축물의 형태와 자연광, 공기의 흐름을 이용해 고산환경을 만들었다.
#죽은 나무 붉게 칠해 기후변화 시사
큐가든이 과거의 식물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강하게 보여준 것은 살아 있는 식물이 아니었다.
녹색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붉은 나무 한 그루였다. 큐가든이 올해 6월 런던 기후행동주간에 맞춰 공개한 ‘기후 변화 참나무(Climate Changed Oak)’다.
북미 원산의 레드오크(Quercus rubra)로, 영국 기온이 사상 처음 40℃를 넘었던 2022년 여름의 폭염과 가뭄 속에서 죽었다. 당시 큐가든에서만 약 400그루가 고사했다.
큐가든은 죽은 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붉게 칠했다. 바로 옆에는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희망의 나무(Tree of Hope)’를 심었다.
따뜻한 기후에 대한 내성을 보여주기 위해 헝가리 참나무( Quercus frainetto ) 묘목을 선택했는데 이는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식재를 위한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
큐가든 리처드 데버렐 원장은 당시 “기후변화가 이미 여기 있으며 우리의 살아 있는 경관을 훼손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라고 경고했다.
#탄소·DNA도 정원이 되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탄소정원(Carbon Garden)을 찾다. 35그루의 나무와 약 6,500개의 식물을 심어 탄소가 식물과 토양, 균류 사이에서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정원으로 풀어냈다. 올해가 이 정원이 완전한 생육 주기를 보여주는 첫 본격 시즌이다.
빗물을 관리하는 레인가든과 바이오스웨일도 조성했다. 기후변화가 계속될 경우 미래 런던의 정원이 어떻게 달라질지도 보여준다.
아지우스 에볼루션 가든(Agius Evolution Garden)은 약 700종의 식물을 DNA 분석을 통해 밝혀낸 진화적 관계에 따라 배치했다. 과학이 정원이 되고 정원이 다시 시민을 가르쳤다.
#270만명이 찾는 정원을 움직이는 사람들
2024/25 회계연도 큐가든과 웨이크허스트의 합산 방문객은 270만명을 넘어섰다. 상업 자회사를 포함해 전체 직원은 1,400명이 넘는다. 과학자만 약 530명이며 이 가운데 65명은 마다가스카르에서 활동한다. 원예전문가도 200명에 가깝다.
운영 주체인 RBG Kew는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fra)의 지원을 받는 비부처 공공기관이면서 자선기관이다. 정원을 지탱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과 조직이었다.
맥스 커런 홍보담당관은 “2024/25 회계연도 RBG Kew의 총수입은 1억2,920만파운드, 총지출은 1억1,790만파운드였다”라며 “이 가운데 정부지원금은 5,230만파운드로 전체 수입의 약 4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입장료와 상업사업, 행사, 연구 프로젝트, 기부·모금 등으로 충당한다”라고 했다.
#큐 원예학 디플로마, 정원사도 직접 육성
큐가든은 3년 과정의 큐 원예학 디플로마(Kew Diploma in Horticulture)도 운영한다.
연간 최대 14명을 선발해 식물학과 토양, 병해충, 온실 환경관리 등을 가르치고 실제 정원에서 여러 차례 실무 배치를 거치게 한다. 교육생은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아니라 급여를 받는 큐 직원이 된다.
정원을 만드는 기술만큼 정원을 계속 관리할 사람을 만드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보이는 정원 뒤에는 ‘거대한 데이터’
큐와 웨이크허스트가 보유한 살아 있는 식물 컬렉션은 6만8,000여 액세션, 2만7,000여 분류군에 이른다. 어디에서 왔고 언제 확보했으며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기록하고 그 자료를 연구와 보전에 다시 이용한다.
시민에게는 정원이지만 연구자에게는 수백 년 동안 축적해온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다.
#왕실 온실서 올리는 결혼식
오래된 시설을 사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내시 컨서버토리(Nash Conservatory)는 19세기 버킹엄궁 정원에 있던 유리온실을 1836년 큐가든으로 옮겨온 건물이다.
지금은 결혼식과 리셉션, 기업행사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최대 200명 규모의 결혼식을 열 수 있다. 19세기 온실을 보존하면서 21세기의 수익시설로 활용하는 구조다.
맥스 커런 홍보담당관은 “267년의 역사 동안 큐가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존재 이유를 바꿔왔다”며 “18세기에는 세계의 식물을 모으는 일이 중요했다면, 21세기에는 사라지는 식물을 지키고 변화하는 기후에 대응하는 일이 더 중요한 임무가 됐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