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의 경주남산 답사기] 스님들 수행의 흔적 간직한 신비로운 계곡

[32] 열반골의 범굴과 절골의 약사여래좌상

2026-09-10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용장골은 남산의 주 계곡으로,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깊숙이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용장마을 옆 용장사지로 흐르는 계곡을 법당골이라 부르는데, 이 법당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반골, 절골, 은적골, 탑상골, 심수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가 이어져 마치 아름다운 소금강을 방불케 한다. 이곳은 그리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열반골은 고위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짧은 골짜기이다. 비록 전체 길이는 1㎞도 채 되지 않는 아담한 규모지만, 골짜기 곳곳에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바위들이 줄지어 있어 걷는 이의 발길을 붙잡는다. 절골은 열반골 초입에서 왼쪽 용장골 본류를 따라 약 0.2㎞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계곡으로,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이곳을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절골 역시 전체 길이가 0.3㎞정도에 불과하지만, 어느 계곡보다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 범굴 절터

 범굴 절터는 열반골 동쪽에 있는 짧은 계곡으로, 현재 천우사(卍)가 자리한 왼쪽 능선 아래에 있다. 이 능선은 고위산을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어 관음사가 있는 열반재로 오르는 길과는 구분된다.

 소위 이무기 능선으로 오르는 길목 입구에서 약 5분 정도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는 길이 나온다. 남산에서도 가장 험난하면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는 이무기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무기 능선으로 가는 계곡길을 따라가지 않고 작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범굴 절터와 연결되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길목에는 높이 4m가량의 바위를 주축으로 돌 축대를 쌓아 올린 절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절터인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절터에서 약 30m가량 계곡을 따라 오르면 두 번째 절터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돌 기단들이 무너져 너부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의 풍우를 견디며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 범굴

 첫 번째 절터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능선 아래에 소위 범굴이라 불리는 큰 동굴이 있다. 이 바위 능선에는 고양이바위, 작은곰바위, 갱의암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다.

 바위 더미 아래에 자리한 이 동굴은 남산에 있는 여러 동굴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얼핏 보면 사람 한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공간이 넓다. 굴 중간에는 사람이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도 있으며, 높이는 약 2m, 폭은 2.5m, 길이는 어림잡아 3m 정도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부터 이곳은 스님들의 선방(禪房)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스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깊은 산중에서 수행했을까? 나도 당시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이곳에서 조용히 참선(坐禪)하며 불도를 닦았을 스님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바깥세상을 바라봤다.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고위산 주봉에서 내려앉은 이무기 능선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자락과 우뚝 솟은 키 큰 나무들뿐이었다. 귀에 들려오는 것이라곤 산새 소리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리고 간간이 불어와 나뭇잎을 일깨우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세상의 온갖 소음과 번잡함이 사라진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잠시나마 옛 스님들의 수행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도 굴 안쪽과 바깥에는 촛불을 밝히고 기도를 올리는 무속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 절골의 약사여래좌상

 절골은 전체 길이가 300m 정도에 불과하지만,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V자 형태의 계곡을 따라 세 곳의 절터가 자리한 아담한 골짜기이다. 산등성이에는 큰 바위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고, 계곡의 물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흘러내린다.

 골짜기 초입에서 100m가량 들어가면 첫 번째 축대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다시 20m쯤 들어가면 두 번째 축대가 나타난다. 이곳 역시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져 지금은 그 형태만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축대가 있는 곳에서 다시 70여m쯤 들어가면 축대 길이가 10여m, 높이가 3m 정도 되어 보이는 곳에 이른다. 당시 절의 본당, 즉 법당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이곳에는 머리는 떨어져 나가고 몸체 부분만 남은 불상이 남쪽을 향해 앉아 있다.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어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부처로, 예로부터 병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 돼왔다.

 1940년 당시 발굴조사 보고에 의하면 이 불상은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머리 부분과 광배는 찾지 못했지만 몸체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양쪽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의 옷 주름은 얇은 천을 걸친 듯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비록 머리는 찾지 못했지만, 불상은 평온한 모습으로 남쪽 산봉우리인 황발봉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어깨에서 무릎 아래까지의 높이는 121cm 정도이며, 불상이 올려져 있던 대좌는 현재 흙 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좌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용장골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머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시습은 21세 때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었으며, 31세에 이곳 용장골에 들어와 7년 동안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용장골의 작은 지류인 절골과 범굴은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지만, 옛 절터와 불상의 흔적을 통해 당시 이곳에서 이어졌던 수행과 신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은둔의 공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가치 또한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