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칼럼] 민본위민 감세정책, 대동법과 균역법

500년 이상 조선왕조 이끈 원동력 민생 우선 경제개혁 정책 일등공신 위민정신 되새겨 국민 마음 얻어야

2026-10-05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은 고려말의 구악을 청산하는 혁명의 주역으로,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천명했다. 정도전은 경제개혁 정책으로 과전법 제정과 동시에 세율 1/10의 고정(固定) 및 재해 발생 시 세금을 감면해 주며 불법 수탈을 금지하는 조세 안정 대책을 주도했다.

 통치자인 군주는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는 대가로 백성을 편안히 잘 살도록 선정(善政)을 베푸는 것이, 임금의 책무라고 주장한 정도전의 민생 안정 철학이 담긴 정책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란 큰 전쟁과,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00만여 명이 흉년으로 기근(飢饉)에 굶주려 사망한 경신대기근(현종, 1670~1671)을 치르고도 519년 동안 계속된 나라였다. 

 중국에선 280년 이상 된 왕조가 드물었고, 세계 어느 왕조도 길어야 200년이었다. 조선이 500여년 이상의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근간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인 민본주의와 민생 정치에 있었다.

 그 중심에 백성들이 내고 있던 세금을 약 80% 줄여준 혁명적 조세개혁인 대동법(大同法)과, 영조가 균역법(均役法)을 추진해 백성의 군포(軍布) 부담을 반으로 줄여준 안민감세(安民減稅) 개혁 정책을 실행한 왕과 관료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는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전세(田稅)인 조(租), 사람의 노동력으로 부과하는 요역세인 용(庸)과 대추·전복과 같은 고을 특산물인 현물에 부과하는 공물(貢物)인 조(調)였다. 

 정부 수입에서 전세보다도 공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면서 공물의 균등 과세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정부는 공물을 고을 단위로 배정하고, 고을 책임자는 이를 다시 민가(民家)별로 안배했다. 분정(分定)의 원칙과 규정이 없어 이를 집집 마다 나누는 아전 등 중간 관리의 횡포와 방납(防納)이란 부정으로 문란해졌다.

 율곡 이이는 관아의 아전들이 제멋대로 부과하는 공물의 현물 공납제 개혁의 필요성을 선조에게 피력했지만, 선조는 외면했다. 

 이이는 백성에게 부과하는 세금의 경중(輕重)에 따라 백성은 임금을 임금답게 여겨 받들기도 하고, 원수로 여기기도 하므로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의 삶을 평안하게 만드는 민생 정치를 펼 것을 제안한 것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 즉 물은 배(임금)를 띄우기도 하지만 군주인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는 순자(荀子)의 경구를 알고 있는 이이의 민생 개혁 정책은, 개혁 의지가 없는 선조에겐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인조반정 후, 첫 영의정이 된 이원익은 인조의 국정 운영 방안을 안민론(安民論)에 두고, 광해군 때 자신이 경기도에서 시행했던 공물을 줄이고 쌀이나 포로 대납하는 경기 선혜법을 확장한 삼도(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대동법(大同法) 추진을 건의했다.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는 뜻을 가진 대동(大同)은 공납에서는 공물을 나눠 내는 윤회분정(輪回分定)을 폐지하고, 고을마다 한꺼번에 공물가를 마련하면서 불균등한 공물가를 균일하게 하는 대동의 조세제도가 대동법이다. 그리고 공물가의 부과 대상을 고을에서 논과 밭인 전결(田結)로 바꿔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었다. 

 인조 시대에 시작된 대동법은 각 고을의 유생층과 지주층 및 부패한 호강층(豪强層)의 극렬한 저항으로 주춤한 적도 있었다. 대동법의 핵심은 토지 1결당 평균 60여 두의 쌀을 거둔 것을 12두로 납부하는 혁명적인 감세정책이었다. 대동법을 반기는 백성의 소리에 효종은 가장 먼저 충청도부터 실행했다. 이의 효과를 인정한 유생들의 호응으로 현종(전라도)을 거쳐 숙종 원년엔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됐다. 인조 때의 이원익, 효종 때의 김육과 같은 정승과 조익 및 이시방 같이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신으로, 대동법을 강력하게 추진한 테크노크라트가 건재했기 때문에 위민개혁(爲民改革) 조세 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광해군 시대에 시작돼 숙종 대에 종결된 대동법으로 관수(官需) 물품 납품 상인인 공인(貢人)의 등장으로 상품화폐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와 더불어 영조 대에 추진된 균역법으로 군포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백성의 실질 소득이 보전돼, 상품 소비로 이어지면서 시장 경제가 활성화됐다.

 정조는 숙종 때부터 성업 중인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의 독점적 특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이란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이로써 자유시장 경제가 촉진되어, 선대(先代)의 감세정책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정조 시대는 경제적 풍요로 인해 조선 후기 최고의 태평성대와 르네상스를 이뤘다.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게끔 민생을 책임지려고 한 정치지도자의 위민 정치철학이 정조의 르네상스 원동력이 됐다.

  위정자는 "나라가 안정되고 집안이 평안하려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라는 황석공(黃石公)이 장량에게 전해준 말을 되새겨 '민본위민(民本爲民) 정치'를 실천해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