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텍스트로 힙(hip), 책으로 합(合)

2026-10-07     강이라 소설가
강이라 소설가

지난 9월, GS편의점과 출판기업 민음사가 협업한 ‘민음사 빵’이 텍스트 힙 열풍을 일으키며 2030세대의 큰 사랑을 받았다. 민음사 빵은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스테디셀러 제목과 표지를 빵 포장지에 담았다.

봉지 안에는 세계문학전집의 표지를 활용한 투명 책갈피가 무작위로 들어 있다. 포켓몬 빵과 띠부띠부씰을 추억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을 겨냥한 이색적인 마케팅은 적중했고, 책갈피를 모으기 위해 빵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늘면서 품절 대란까지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세계문학전집의 판매까지 늘었다고 하니 ‘책과 빵’의 신선한 조합은 다행히 남는 장사가 된 셈이다.

텍스트를 빵으로 맛보았다면, 이번엔 쇼핑으로 텍스트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부산 영도의 피아크에서 전시 중인 <울트라백화점, 텍스트 쇼핑클럽>이 제격이다.

서울에 이어 부산에 상륙한 <텍스트 쇼핑클럽>은 텍스트를 엄숙한 학문이 아닌, 즐거운 ‘쇼핑의 대상’으로 재정의하며 자유롭게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인사이트시식코너, 크리에이터문화센터, 리딩스퀘어’ 등 여섯 개의 클럽 챕터를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텍스트 페이퍼를 쇼핑 바구니에 담는다. 40개의 텍스트 페이퍼에 추가로 구입한 굿즈와 텍스트까지 모아 북 바인딩을 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텍스트 북이 완성된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문장들은 앞으로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줄 당신만의 관점입니다.’

무려 네 시간을 들여 만든 나의 텍스트 북 표지에는 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용한 점괘처럼 들어맞는 멋진 텍스트를 보며 이 전시가 책이라는 결과물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통해 영감을 경험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음사 빵에서 얻은 햄릿 투명 책갈피에 환호하고, 영도까지 가서 텍스트 쇼핑 무아지경에 빠졌음에도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아무리 많아도 텍스트는 식전 요리일 뿐.

부산항 대교를 타고 수영구의 F1963으로 향했다. F1963은 와이어를 생산하던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전시장과 도서관, 서점 등이 들어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재생 건축물이다. ‘F’는 공장(Factory), ‘1963’은 공장이 완공된 연도를 뜻한다.

F1963에는 중고 서점 ‘예스24’와 예술 전문 도서관 ‘F1963’이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은 회원제로 운영되지만, 비회원도 일일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이용할 수 있다. 공간 곳곳에 스며든 미학을 누리며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사진집을 두어 시간 들여 읽었다. 서둘러 무언가를 고르거나 소비하지 않고, 한 권의 책 앞에 오래 머무는 시간이었다. 그제야 조금 허기가 가시는 듯했다.

한결 든든한 마음으로 중고 서점을 둘러보다 우연히 내가 쓴 책을 발견했다. 3년 전에 출간한 두 번째 소설집이었다. 반가우면서도 못내 씁쓸했다. 처음 책을 구입한 이의 손을 떠나 중고 서점 서가의 맨 아래 칸으로 옮겨온 이유가 작가인 내 탓으로 여겨졌다. 정가의 반값을 내고 내 책을 다시 구입했다. 신간 한 권도 골라 서점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책을 중고로 내놓은 누군가를 여전히 야속해하며 책장을 펼쳤다. 그런데 색색의 인덱스가 눈에 띄었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 첫 페이지마다 인덱스가 붙어 있었다.

끝까지 읽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첫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포스트잇에는 소설에 대한 짧은 감상평이 적혀 있었다. 재빨리 나머지 여섯 편의 마지막 페이지도 살폈다. 모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각각의 소설을 읽고 난 뒤 남긴 솔직한 감상이 단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이름 모를 독자가 책을 읽고 성의 있게 남긴 일곱 편의 감상. 나는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내고 고른 문장도, 예쁘게 제본한 텍스트 북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은 문장이 다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문장이 되어 남은 것. 내가 쓴 책에 독자가 붙인 텍스트. 내가 쓴 문장에 누군가의 문장이 더해져 한 권의 책이 완성된 셈이다. 더할 나위 없다.

강이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