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시대] 차라리 잠잠하면 본전일 때도 있다
정치인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정직한 후보2’의 정치인 주상숙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평소라면 감추거나 돌려 말했을 속마음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한 채 솔직함을 쏟아내면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관객은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정치인이 솔직하다는 것은 과연 좋은 정치의 조건일까. 솔직함은 분명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모든 말이 적절한 것도 아니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말할 것인지, 무엇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절제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결국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잘 다듬어진 연설문이나 글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어떤 말을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표현을 쓰며, 불리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는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은 사적인 말과 다르다. 시민의 대표라는 공적인 위치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인의 부적절한 언행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볍지만은 않다. 음주운전과 같은 법 위반이나 상대를 향한 거친 말이 논란이 될 때마다 단순한 실수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일반 시민에게 적용되는 기준과 정치인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다르게 보이면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더구나 같은 행동을 두고 자기편이면 ‘실수’라고 하고 상대편이면 ‘자격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 역시 불공정이다. 잘못의 내용보다 어느 편에 서 있느냐가 먼저 판단되는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인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실수하지 않는 정치인보다, 실수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 정치인을 보게 된다.
최근 울산에서도 시장의 거친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언론인을 향한 강한 표현을 두고 언론단체가 발언의 맥락과 경위를 밝히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개별 발언의 정확한 맥락과 당사자의 설명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민의 입장에서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시민을 위한다는 정치의 언어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울산시장의 취임사에는 ‘시민이 주인’이라는 표현과 함께 ‘모든 울산 시민의 시장’, ‘오직 시민만 바라보며’, ‘시민의 이익만 생각하겠다’는 다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시민은 박수를 치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정에 질문하는 사람도 시민이고,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도 시민이며, 시장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도 시민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만 시민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까지 시민으로 대하는 것이 ‘시민을 위한다’는 말의 출발점 아닐까.
그래서 막말과 남 탓의 문제도 단순히 말투의 문제가 아니다. 거친 말은 상대를 앞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비판이 돌아오면 상대의 잘못을 끌어와 자신의 말을 뒤로 밀어내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했는가’가 문제였는데 어느 순간 ‘상대가 무엇을 잘못했는가’가 새로운 쟁점이 된다. 공격하고, 논점을 돌리고, 다시 공격한다. 이런 방식이 반복되면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흠을 찾아내는 과정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특정 정치인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밖에서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시민이 평가하는 것은 의도가 아니라 결국 눈앞에 드러난 말과 행동이다. 정치에는 비판이 필요하다. 정책을 따지고 행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정치의 당연한 역할이다. 그러나 비판과 막말은 다르다. 비판은 사안을 향하지만 막말은 사람을 향하기 쉽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모든 문제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다르다. 정치는 갈등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의 말도 갈등을 키우기보다 풀어가는 데 쓰여야 하지 않을까. 결국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 수 있다.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말을 하는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는가.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상대를 끌어들이기보다 자신의 말과 행동부터 돌아보는가.
‘시민을 위한다’는 말은 많이 한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그 말을 증명한다. 그래서 때로는 한마디를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잠잠한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이소영 전 남구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