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바쁜 일상 속, 산과 농원이 건네는 울림

바쁜 시월 일상 벗어난 예술 산책 거장들 작품 속에 담긴 깊은 인연 위로 안겨준 작품과 멘토에 감사

2026-10-19     변외식 전 남구의회 의장·전 울산과학대 유아교육과 겸임교수·강남새싹유치원장
변외식 전 남구의회 의장·전 울산과학대 유아교육과 겸임교수·강남새싹유치원장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아름다운 가을 창공을 단 한 번 올려다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달아나는 시월이다. 유아 교육 현장은 1년 중 가장 분주하고 고단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영어 페스티벌과 학부모 대상 교육, 그리고 한 해 농사의 결실을 평가받고 원의 미래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원아 모집 설명회까지 다양한 체험과 행사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된 일상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국군의 날과 개천절, 한글날로 이어지는 긴 연휴는 뜻밖의 소중한 숨고르기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모두들 여행을 다녀오거나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 긴 연휴를 보낼 때, 나 역시 단 하루만이라도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향한 곳은 바로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전시회장이었다. 늘 나의 삶에 지혜를 전해주는 멘토이자 소중한 친구 같은 막내이모 김옥순 여사님의 따뜻한 정보와 권유가 나를 미술관으로 이끄는 귀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첫 번째 여정으로 찾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근대 추상화의 거장 유영국 화백의 11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향 울진 출신의 작가답게 화폭 위에 펼쳐낸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향연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계속해서 미련과 감동이 남는, 우리 민족의 아련한 정서가 깊게 스민 작품들이었다.

 태백산맥의 끝자락을 형상화한 유영국의 '산'은 민족사가 견뎌온 깊은 역사적 아픔을 담아낸 듯 웅장하면서도 거칠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화폭을 가로지르는 빛의 강렬하고 역학적인 반사는 지친 내 영혼을 흔드는 듯한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이에 반해 화면을 가득 채운 '바다'는 인간들이 가진 욕망과 때로는 배설까지도 모두 받아주고 빨아들이는 무한한 베풂의 온기를 보여주었다. 그 바다 속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잔잔한 평화는 비우고 내어놓는 무소유의 철학을 가만히 가르쳐주며 마음을 채우는 귀한 선물이 됐다.

 이어 발걸음을 옮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다음 달 초까지 이대원 화백의 전시회가 이어지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파주 출신의 이대원 화백은 작품을 통해 평화롭고 아련한 기억 속으로 관람객들을 정겹게 끌어당겼다.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을 기념해 부친이 직접 농원을 사서 일구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작품 대부분은 파주 농원과 경기 북부 산의 사계절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농원의 사계절과 북한산, 도봉산의 풍경은 늘 우리 가까이 있는 가장 서민적인 소재였으며, 그가 사용한 특유의 아름다운 색채는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을 깊게 적셔주었다.

 작고할 때까지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말년을 보낸 혜화동의 창이 있는 집은 담쟁이넝쿨과 함께 소박한 삶의 따스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1956년작 <창변>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따스하게 되살려주며 마음 가득 행복한 순간을 선사해 주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유영국, 이대원, 장욱진, 김창억, 임완규, 권옥연 화백 등 한국 근대 미술을 이끌어간 거장들의 특별한 인연도 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경성제2고보(현재의 서울 경복고등학교) 미술반 시절, 함께 울고 웃으며 스승 사토 구니오 교사에게 그림을 배운 동문들로 '<2.9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2.9인회>는 경성제2고보의 '2'와 스승 사토 구니오 이름의 '9'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삿포로에서 태어나 도쿄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27년 조선으로 건너와 학생들을 가르친 사토 구니오 교사는 제자들에게 유럽 현대미술과 조선 공예의 아름다운 색채를 바라보는 깊은 안목을 키워주었으며, 이대원 화백은 그의 특별한 애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시회 입구에 소개된 작품 <담>은 외교부가 소장하고 있는 이대원의 대표작으로 거장의 깊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를 모두 관람한 후, 고종황제가 비통한 심정으로 걸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의 장소인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을 가만히 걸었다. 계절이 전해주는 아늑한 가을 감성과 함께, 한 해 동안 정성껏 일군 알곡을 수확하는 듯한 충만하고 의미 있는 마음을 가득 얻는 시간이었다. 유아 교육 현장의 바쁜 시월 속에서 찾아낸 이 귀한 예술 산책을 가능하게 해준 나의 삶의 멘토이자 친구 같은 막내이모 김옥순 여사님께 가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