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살 맞은 고래 따라 줄 1400m가 풀렸다”…장생포 포수의 생생한 기억

울산작가회의 ‘기억해야 할 울산의 근대’ 2013년 윤성도 씨 구술 대담 다시 조명 16세에 고래배 승선…목선·철선시대 경험 포경 작업 방식·인명사고·선원 생활까지 지역 문학인들, 사라지는 산업 현장 기록

2026-10-21     고은정 기자
‘울산시지’ 1987년판에 실린 장생포항.
“고래에 포가 맞으면 나머지 줄을 풀어주는데 약 1,400m의 줄이 풀려 나갑니다”

고래를 발견한 포경선이 접근해 작살포를 발사하면, 작살을 맞은 고래가 달아나는 방향으로 긴 줄이 풀려 나갔다. 포경선은 줄을 조절하며 고래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접근해 작업을 이어갔다.

울산 장생포에서 고래잡이에 나섰던 옛 포수 윤성도 씨의 증언이다.

울산작가회의가 펴낸 『기억해야 할 울산의 근대』에는 2013년 7월 윤 씨와 아들 양석관 씨를 만나 진행한 대담 ‘잊힌 장생포의 풍경’이 실려 있다. 당시 문학잡지 <시평> 회원들과 울산작가회의 소속 임윤 작가 등이 함께 기획한 자리였다.

13년 전 지역 문학인들이 기록한 포수의 증언은 사라진 포경 현장의 노동과 위험, 선원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윤 씨는 1972년 열여섯 살에 처음 고래배를 탔다. 목선 시절에는 하루 한두 마리를 잡았지만, 철선이 등장한 뒤에는 하루 최대 12마리까지 포획했다고 회고했다. 잡아본 가장 큰 고래는 길이 약 20m에 달하는 참고래였다.

고래를 운반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목선 시절에는 잡은 고래를 배 옆구리에 묶어 장생포항으로 끌고 왔지만, 철선이 등장한 뒤에는 고래에 공기를 주입해 물에 뜨게 한 다음 여러 마리를 함께 운반했다.

대담에는 위험한 작업 환경도 담겼다. 윤 씨는 고래를 잡은 뒤 줄이 끊어져 포수가 숨진 사고와 포경선 수리를 위해 배를 육지로 올리다 선체가 기울어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일도 회고했다.

기억해야 할 울산의 근대
고래잡이에는 나름의 규칙도 있었다. 귀신고래는 먼저 발견한 배의 권리를 인정해 다른 배가 잡더라도 처음 발견한 배에 절반을 나눠주는 관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업은 주로 3월부터 10월까지 이어졌다. 궂은 날씨와 높은 파도는 출항을 가로막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어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임윤 작가는 “당시 <시평> 회원들과 함께 고래를 잡게 된 배경과 실제 고래잡이 모습, 현장의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마련한 대담”이라고 설명했다.

대담에는 일본 포경회사의 활동부터 광복 이후 한국 포경업의 성장, 1980년대 상업포경 중단까지 장생포 포경업의 변천사도 담겼다.

1986년 상업포경 중단 이후 장생포는 고래박물관과 고래문화특구를 중심으로 관광·문화 공간으로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