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가을을 품은 한 알의 넉넉한 사랑

가을 햇살로 익어가는 둥근 배 ‘매력적’ 삼국유사부터 시조까지 스토리 한가득 익어가는 과일 속 삶의 지혜 엿보기도

2026-11-02     이병근 시인·문화평론
이병근 시인·문화평론

황금색, 붉은색에서 파생된 파스텔릭 한 색들 경계가 모호하면서도 균형과 밸런스로 무늬를 자아내는 가을을 울긋불긋하다고 표현하는 순우리말이 있다. 그런데 더 깊이 고찰하면 가을은 흰색 계절이기도 하다. 음양오행 사상에서 방위 서쪽 색상을 ‘흰색(白)’이라 했다. 그래서 가을을 백추라고 한다. 인생의 사계절이나 세대의 흐름을 비유해 봄을 ‘청춘(靑春)’, 여름을 ‘주하(朱夏)’, 가을을 ‘백추(白秋)’, 겨울을 ‘현동(玄冬)’이라 하여 청년층의 연장선이나 성숙한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과일도 저마다의 빛깔로 계절을 이야기한다. 붉은 사과가 햇살을 머금고 익어가고, 감나무 가지에는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묵묵히 제 빛깔을 익혀가는 과일이 있다. 바로 배(梨)다. 배는 화려하지 않다. 사과처럼 붉은빛으로 시선을 끌지도 않고, 포도처럼 송이마다 풍성한 자태를 뽐내지도 않는다. 그저 둥글고 넉넉한 몸집으로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제 몸속에 가득 담아둔 맑은 과즙을 내어준다.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한 소리와 함께 입 안 가득 퍼지는 시원함, 배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 제5 ‘보양이목(寶壤梨木)’ 조에 승려 보양(寶壤)과 청도 운문사(당시 작갑사)의 창건 설화에 배나무가 등장한다. 보양법사가 중국 용궁에서 돌아올 때 용왕의 아들인 이무기(이목·璃目)를 데려와 절 옆의 연못에 살게 했다.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자, 보양이 이무기에게 비를 내리게 해 가을 가뭄을 해결했다. 하지만 이무기가 하늘의 허락 없이 함부로 신통력을 부려 비를 내렸다는 이유로, 천제(하늘)가 사자를 보내 이무기를 처벌하려 했다. 다급해진 이무기가 보양에 살려달라고 빌었고, 보양은 이무기를 마루 밑에 숨겨주었다. 사자가 이무기를 내놓으라고 추궁하자, 보양은 재치 있게 뜰 앞에 있는 배나무(이목·梨木)를 가리키며 “저기 있는 것이 이목(이무기·배나무의 음이 같음을 이용)입니다”라고 둘러댔다. 사자는 진짜 이무기인 줄 알고 그 배나무에 벼락을 내리쳤고, 배나무는 벼락을 맞아 부러지고 시들어버렸다. 이처럼 배나무가 이무기 대신 희생당하면서 친구인 이무기를 살려냈다는 신비로운 배나무 이야기다. 삼국 시대에도 우리 선조들이 배를 즐겨 먹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고대 기록에는 질 좋은 토종 배 품종으로 ‘함소리(含逍梨)’나 ‘교리(交梨)’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교리’는 신선들이 먹는 신비로운 배로 비유될 만큼 맛이 뛰어난 배로 전해져 온다. 배를 생각하면 먼저 넉넉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나지 않은 둥근 모양도 그렇지만, 자신을 내어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과일이기 때문이다. 껍질을 벗기고 한 조각 베어 물면 달콤함보다 먼저 시원함이 찾아온다. 그 시원함 속에는 가을 햇살과 바람, 그리고 한 해를 견뎌온 나무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배는 우리 민족의 생활과도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예부터 제례상에 빠지지 않는 귀한 과일이었으며, 명절이면 조상에게 올리는 정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얀 속살과 둥근 모양은 깨끗함과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시대 배나무는 백성과 선비를 상징하는 과일로도 자주 쓰였다. 특히 ‘이씨(李氏) 왕조’를 뜻하는 상징성과 맞물려, 조선 시대 궁중이나 양반 가문에서 배나무를 심어 가문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도 했다. 배(梨)를 주제로 조선 시대 문학과 민속, 그리고 우리 일상 속에 깊이 스며있는 시조가 있다. 봄날에 피어나는 배꽃(이화,梨花)은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하는 아주 친숙한 소재였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조년이 지은 유명한 시조 속에서 배꽃은 애틋하고 서정적인 봄밤의 풍경을 완성해 준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하수(銀河水)가 찬 흝 제 /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배꽃은 청초하고 고결한 선비의 절개나 애잔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적 매개체이다. 또 옛 전통 민속에서는 집 안마당이나 대문 바로 앞에 배나무를 심는 것을 꺼리는 풍습이 있었다. ‘배(梨)’의 음이 ‘이별(離別)’이나 ‘헤어짐’을 뜻하는 한자 ‘떠날 리(離)’와 소리가 같아, 집안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길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나무는 보통 집 뒤꼍이나 과수원, 밭 등 멀찍한 곳에 심어 가꾸곤 했다.

둥근 몸속에 가을이 들어 있고, 하얀 속살에는 여름의 햇살이 녹아 있다. 한입 베어 물면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달콤함이 입안에 번진다. 어쩌면 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라고,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고, 저마다의 계절을 묵묵히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향기를 품게 된다고. 가을은 그렇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그리고 배는 그 가을을 가장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과일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식탁 위에 놓인 배 한 알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한 해를 살아낸 농부의 땀이며 자연이 베푼 선물이기를 바란다. 둥근 배 하나에 담긴 넉넉한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익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마침내 누군가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일인지도 모른다.

울산은 배 재배성지이다.《세종실록지리지》 등 조선시대 문헌에도 울산 지역의 토산물로 배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특히 울산 울주군 서생면 등을 중심으로 기후와 토양이 배 재배에 적합하여 오랜 세월 동안 명품 과일 산지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 고품질의 울산 배(신고, 황금배 등)가 활발히 생산 및 수출되고 있다. 이병근 시인·문화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