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의 경주남산 답사기] 화려했던 천년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왕의 자리
[34] 삿갓봉(笠峰)경애왕릉과 석가여래입상 울창한 송림 가운데 작은 무덤 조성 신라 마지막 왕 ‘경애왕’ 왕릉 추정 근처 계곡따라 소나무숲 아래 불상 오랜 풍화에도 인간적 따듯함 남아
삿갓봉은 경주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이 남쪽으로 맥(脈)을 이어 가다가 약수곡 어귀에서 서쪽으로 허리를 틀어 내려오면서 작게 솟아오른 삼각형 봉우리를 가리킨다. 삿갓처럼 생긴 이 봉우리를 마을 사람들은 입곡(笠谷), 삿갓골 또는 삿갓곡이라 부른다.
# 경애왕릉(景哀王陵)
삿갓골 언저리에 있는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제56대 경순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전(前) 임금의 시신을 서당(西堂, 서쪽 대청)으로 운구하여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와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경애왕릉은 경주에 조성된 신라 왕릉 가운데 마지막 시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 왕건을 도왔다. 그러나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사로잡혔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비운의 왕이었던 셈이다.
현재 경애왕릉으로 불리는 무덤은 규모가 매우 작다. 무덤의 둘레는 약 3.5m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봉분 가장자리를 따라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보일 뿐 별다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 왕릉 가운데서도 규모가 작은 무덤으로 꼽힌다.
필자는 해목령 아래에 있는 일성왕릉이 실제로는 경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신라 왕릉의 상당수는 고고학적 지식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비정(比定)되었다. 비정이란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 문헌 기록과 주변의 유사한 자료 등을 비교하여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옛 지명이나 유적, 유물의 위치와 성격을 특정하는 일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신라 왕릉으로 알려진 무덤 가운데는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으며, 현재의 경애왕릉 역시 실제 경애왕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해목령은 반월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고갯길 위의 작은 봉우리로 추정된다. 현재 경애왕릉으로 불리는 무덤보다 일성왕릉이 있는 곳이 해목령에 더 가까우며, 두 무덤 사이의 직선거리는 불과 300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신라는 견훤의 기습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문헌에 기록된 해목령의 위치를 고려하면, 현재 경애왕릉으로 불리는 삿갓봉 아래까지 이동하여 무덤을 조성했을 가능성보다는 해목령에 가까운 일성왕릉 일대에 안장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현재 일성왕릉이라 불리는 무덤이 경애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문헌 기록과 지리적 위치를 바탕으로 한 추정이며,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명확히 밝혀진 사실은 아니다. 현재 경애왕릉으로 불리는 무덤은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고 봉분도 일반적인 민묘보다 커서 오래전부터 왕릉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분 자체는 평범한 원형 토분 형태이며, 주변에서도 왕릉임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시설이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왕릉 앞에 석상이 하나 놓여 있지만, 이는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 입곡 석가여래 입상(笠谷 釋迦如來 立像)
경애왕릉에서 남쪽, 내남 방면으로 약 300m쯤 가다 보면 삿갓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200m쯤 걸어 올라가다가 길이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50m가량 더 가면 소나무숲 아래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은 머리와 몸통 부분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허리 아랫부분과 대좌도 보존되어 있다. 다만 머리 위의 광배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조각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엽 무렵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는 곱슬머리로 조각되어 있으며, 정수리 부분은 우뚝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근엄한 인상을 주지만, 두 귀가 어깨 부근까지 길게 내려오고 귓불이 두툼하여 친근한 느낌도 든다. 목에는 삼도(三道, 불상의 목에 표현된 세 줄의 주름)가 새겨져 있고, 두 어깨에는 가사의 깃이 양쪽으로 걸쳐져 있다.
광배(光背)는 일부 훼손되었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이루어진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두광은 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신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광배 안쪽에는 화불(化佛), 즉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를 담은 작은 여래상들이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은 사라진 광배 부분에도 화불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와 입술 부근은 다소 마멸되었지만, 중생을 굽어보는 듯 지그시 감은 눈과 도톰한 두 뺨에서는 온화한 인상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풍화되었음에도 불상의 얼굴에는 어딘가 인간적인 따뜻함이 남아 있다.
경애왕은 신라의 비운의 왕이었음이 틀림없다. 입곡 석가여래입상 역시 이곳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흩어져 있던 불상 조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불상의 상체 부분과 허리 아랫부분, 대좌 등이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최근에 한곳으로 모셔 놓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불상이 지금의 모습으로나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외부의 침략으로 나라가 기울고, 왕마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신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고 일컬어지던 남산에는 지금도 그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경애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화려했던 신라의 영화보다는 나라의 마지막을 지켜보아야 했던 한 왕의 쓸쓸한 운명이 먼저 떠오른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