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시] 논에 비친 산 그림자
2018-07-03 박혜선 시인
산을 오른다
맨발로
제일 높은 봉우리
다녀간 표시로
꽂아둔 깃발처럼
푹,
아버지는 그 자리에
삽을 꽂아 놓았다.
◆ 詩이야기 : 땅은 일할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논이든 밭이든 언제든 와서 일하고 일한 만큼 따박따박 곡식을 월급으로 준다.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산 아버지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다. 시키지 않아도 땅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 일 했으며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제 자식 돌보듯 살폈다. 볍씨 뿌리느라 자식 태어나는 것도 못 봤고 콩 타작을 하느라 운동회도 못 갔으며 태풍에 쓰러진 벼 포기 세우느라 자식 열 오르내리는 것도 몰랐다.
평생을 논밭에서 산 아버지는 올 봄 퇴직을 했다. 뇌졸중으로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아버지에게 삽을 꽂는 일이, 논둑을 다듬고 곡식을 키우는 일이 버겁다는 걸 땅도 알고 있었다. 땅은 퇴직금으로 논둑에 핀 개망초 한 무더기 내놓았다. 일 하느라 제대로 들은 적 없는 풀벌레 소리를, 풀 향기를 평생 듣고 볼 수 있게 들판에 좍 풀어놓았다.
◆ 약력 : 경북 상주 출생. ‘새벗문학상’에 동시 ‘감자꽃'이 당선됐다. 동시집으로 <개구리 동네 게시판>, <텔레비전은 무죄>, <쓰레기통 잠들다> 등이 있으며 한국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