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칼럼] 위대함의 기준
과거 ‘위인’은 업적의 위대함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엔 인격 중시하며 위인 개념 재정의 되는 중
‘위대함’은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는 인격서 나와
“그는 숭고하다, 기에는 너무나 친근감을 주고 근엄하기에는 너무 인자하셨다. 그의 인격은 위엄으로 나를 억압하지 아니하고 정성으로 나를 품에 안아 버렸다. 도산은 혁명가요 민족적 지도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높은 존재이다. 그는 위대하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스러운 데가 하나도 없었다. 거짓말이나 권모술수를 쓰지 않았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정치에 꼭 필요하다면 그분은 전혀 정치할 자격이 없는 분이었다.”(피천득 수필, ‘도산(島山)’ 중)
위대한 업적 이전에, 인격적으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수필가 피천득의 눈에 비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인간으로서 높은 존재’였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에 가깝다. 숭고함과 친근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근엄함과 인자함이 균형을 이룬 인간 말이다.
예전에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위인들의 주변 사람들, 즉 가족이나 이웃들이 그들을 평가할 때도 과연 그들은 위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 세상에 수많은 위인들이 존재하고, 그들에 대한 위인전도 많이 있지만, ‘위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대체로 그들의 ‘업적’이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들에게 아주 괴팍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던 사람들도 이 잣대만으로 위인으로 추앙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위인 즉 ‘위대한 사람’의 기준은 오로지 업적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업적만 대단하다면 ‘인격’은 아무래도 괜찮고, 평범한 ‘인간’들의 희생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단의 거목 고은 선생의 성추행이 이제 와서 폭로되는가 하면, 대단한 업적으로 떵떵거리던 사람들의 갑질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한다. 과거엔, 업적만으로 그 분야에서 이미 ‘위대함’을 획득한 사람들의 일탈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 ‘위대함’을 재정의(再定義)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에서도 춤만 잘 추고, 노래만 잘한다고 뽑히지 않는다. 경연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격적인 면모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 한 마디 했다가는 우승권에서 멀어진다.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여자 팀 추월 대표 선수들에게 쏟아진 비난만 해도 그런 맥락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도, 뛰어난 업적만 있다면 인격적 결함은 소소한 흠결 정도로 여겨주던 시대는 저물고 있고, 또 완전히 저물어야 옳다.
위대함의 재정의는 ‘업적 지상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흐름이고,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이나 ‘저녁이 있는 삶’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들이다. ‘업적’이 위대함의 최대 지분을 가졌던 시대에선, 내가 누리는 소소한 삶의 여유나 행복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힘 있는 자들이 업적을 내세우며 자기 수하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렇다 할 업적은 없지만, 우리 주변엔 위대한 사람들이 있다. 고아(高雅)한 인격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사람 말이다. 그는 과일 장수나 택시 기사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가정 주부일 수도 있다. 그들이 내뿜는 향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향기는 삶을 통해 은은하게 베어 나온다.
필자도, 뛰어난 업적만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는 고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곁에 많이 두고 싶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런 인격으로 변모돼 가길 원한다.
뛰어난 천재 몇이 그 시대의 역사를 바꿔 왔다지만, 우리들의 소소한 삶은 주변의 인격자들이 바꿔 왔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삶을 바꾸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을 모르는 사람보다, 여러분을 아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세요. 모르는 사람들은 업적에 박수를 치겠지만, 진짜 위대함은 인격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 인격을 판단할 겁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