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길 주필 회상록] 뭐 하러 왔노 중앙일보시절-1980년 ④
고향 돌아온 풍운아 이후락과 얘기할 기회 자주 가져
“떡 만지다 보면 떡고물 생기게 마련…”이란 말 회자
울산은 그를 ‘현대사의 애향 인물’로 두고두고 기려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 했다. 신군부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이후 1980년 8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수사적 명분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 중심인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권력장악에 성공했다. 그 사이에 이른바 ‘서울의 봄’은 공포의 계절로 변했다. 5·17, 5·18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기성 정치인들은 손발이 묶인 채 정치무대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신군부 시대’의 울산의 정치도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전두환은 제11대 대통령 취임 후, 기성 정치인들과 시민 여론을 꽁꽁 묶어놓은 상태에서 유신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 했다.
새 헌법은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었고, 12월 31일에는 대통령 선거법이 마련되었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는 이듬해인 1981년 2월 11일에 실시되었다.
우선 새로운 헌법에 대한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 결과 울산의 경우는 대체로 전국 평균(91.6%)보다 높은 찬성률을 기록 했다. 울주군이(96.5%)이 울산시(94.7%)보다 더 높은 찬성률을 나타냈다.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새로운 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폐지 되었고, 국회도 해산되었다. 국회가 새 헌법에 따라 구성될 때 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가의 권한을 대행했다.
1979~80년 정치 격동기에 울산 출신 풍운아 우석(又石) 이후락(1924~2009)의 동정이 유독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1979년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10·26 한밤 박정희 대통령 시해 급보를 접하고 고향 울산에서 밤사이 상경하고 없었다.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출생한 그는 1942년 울산농업고등학교(현 울산공고)를 졸업했다. 1945년 광복 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다음해 3월 소위로 임관 했다. 1951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4년 육군본부 병참감, 1957년 주미대사관 무관, 1959년 국방부 기관장 등을 지낸뒤 1961년 소장으로 예편 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혁명정부에 가담한 후 박정희 정권의 책사(策士) 역할을 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비서실장이 되었다. 이후 1969년 10월 주일대사,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 했다.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주석과 비밀회담을 가진 후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 깜짝 놀라게 했다.
1973년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사건 개입의혹으로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한동안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79년 3월 울산·울주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그는 이에 앞서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인 1964년 학교법인 울산육영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 했다. 또한 울산공단에 근무할 우수인재 양성을 위해 영국 차관 도입을 주선, 울산공과대학과 병설 울산공업전문대학을 설립했다. 1970년 3월 제2대 이사장을 연임하면서 6년 10개월 간 대학발전에 공헌했다. 또 울산문화방송㈜의 전신인 울산민간방송㈜를 설립해 지역방송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9~80년 격동기에 울산에서 몇번 만난 이후락의 모습은 기억에 생생하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선후 국회해산과 함께 졸지에 구 정치인이 된 그는 억울했다. 이른바 구 정치인 적폐에 몰려 김종필 등과 함께 부정 축재 혐의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1979년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그의 ‘떡 고물론’은 인구에 회자 됐다. 당시 유일한 호텔인 울산관광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를 안타까워 하면서 “나는 영원한 박정희교의 신도”라는 말도 남겼다.
JP(김종필)는 제주감귤농장 등 재산을 환원하고, HR(이후락)은 그가 설립하고 키워온 고향의 학교법인 육영회 산하 학교 등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게 된다.
생애 한 시대의 마지막을 야인으로 돌아온 그는 말년을 ‘도평요’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마음을 달래다 세상을 떠나게 된다. 2009년 별세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가마옆에서 갖 구은 도자기를 들고 활짝 웃고 있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울산은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으며 고향을 지극히 사랑하고 어려운 시절 공업센터로 탄생시키는데 앞장서 대도시로 만든 그의 공적을 두고두고 기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