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명 1진 투입…총 641명 참전 135명 전사
‘구국일념’울산 출신 재일학도의용군 19명
日 영주권 있지만 조국위해 대한해협 건너
종전 후에도 귀국 못하고 힘겨운 인생 살아
늦었지만 지역에‘참전비’세워 넋 위로를

▲ 고국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재일 학도의용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해로 6ㆍ25전쟁 61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6ㆍ25전쟁은 점점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이 땅엔 전쟁의 상흔이 많이 남아있다. 울산과 6ㆍ25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울산이 6ㆍ25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되짚어보고 울산출신의 군번 없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실체를 발굴해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구국열정과 6·25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집자 주>

 

△1950년 7월 ‘조국방위선언’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간의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원동력은 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이 조국을 위해 전쟁터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6·25전쟁때도 일본 거주 청년과 학생들이 유태인 못지않은 조국애로 고국의 전선에 목숨을 바쳤다.

‘우리는 양심과 책임을 가지고 날로 격화해 가고 있는 고국의 내전 해결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피의 대가로써만 해결될 것임을 믿는다. 여기에 엄숙한 역사의 심판에 물어 널리 세계의 동지에게 호소하여 결연히 조국방위전에 참가해 전승임무를 실천할 것을 기약하노라’

1950년 7월 일본 내 한국방위의용대총본부는 이같이 ‘조국방위선언’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학도들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과 청년신분이었던 이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오로지 조국을 향한 구국일념으로 자신의 안위와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풍전등화의 조국으로 뛰어들었다.

이들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 태극기에 참전의 결의를 다지며 적은 이름들이 눈에 띈다. 일본에선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탓에 6·25 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만들었다. 사진제공=우지식 선생

이들이 고국 전선에 참가하기까지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의용대를 조직한 이들은 UN사령부에 한국전선에 참전케 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쓰러져 가는 고국의 현실을 통탄하며 서로 껴안고 통곡을 했다.

그러나 대표들이 다시 UN사령부를 찾아가 국민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겠다고 자원하는데 거부할 권리가 어디있느냐고 항변했다. 결국 UN사령부는 이들의 애국심을 인정하게 돼 참전이 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훈련을 받은 제1진 69명이 1950년 9월 1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면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6·25전쟁 참전이 시작됐다.

이후 11월 중순까지 5차례에 걸쳐 총 641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의 전선에 참전해 135명이 전사(실종자 포함)했다.

이들 대부분이 일본 영주권을 보유해 한국에서의 병역의무가 없었지만 조국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뛰어든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부산 동구 초량동의 소림사에서 머물며 일본 정부의 입국 허가를 기다렸지만 일본 정부는 출국 허가를 받지 않고 나갔다는 이유로 재입국을 거부해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일본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

한국에 남은 이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리고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 종전 뒤 일본의 귀국 허가를 받기 위해 머물렀던 부산 초량동 소재 소림사.

△울산출신 재일학도의용군 19명

서울 전쟁기념관 2층 6·25전쟁실에는 이름과 구호가 적힌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이 태극기는 일본 법정대학에 다녔던 정태희씨가 보관해 온 것으로 6·25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참전의 결의를 다진 의미 있는 전쟁 유물이다.

태극기 안에는 정태희씨와 대학후배인 우지식이란 이름이 선명하다.

일본에서 태극기를 구하기 힘들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넣어 만들어졌다.

우지식, 그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한 울산 출신 재일학도의용군이다.

울산 출신 재일학도의용군은 모두 19명이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거침없이 조국의 전장으로 뛰어 들었다.

대한해협을 건너면 다시 살아올 수 있다는 기약이 없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뼈 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정작 울산에는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다.

재일학도병 641명중 출신 지역으로 볼 때 울산출신 재일학도병이 가장 많다.

이들 19명중 강일용, 이백락씨는 소위로 임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창호씨는 육군병장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울산보훈지청 자료에 따르면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유족은 현재 남구 2명, 울주군 2명 등 모두 4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울산 출신 재일학도병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지난 2009년 허 령 시의원이 서면질의를 통해 이들의 참전비를 세우자고 건의하면서 부터다.

이에 대해 울산시는 북구 송정택지개발지구내 송정역사공원 조성사업 용역시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 건립을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하지만 울산시는 아직까지 이들 19명의 학도의용군 명단조차 확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참전비 건립사업에 대해 LH공사와 구체적인 추진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H공사 울산관계자는 “울산시로부터 울산 출신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 건립에 대해 공식적으로 협조요청 공문을 받은 적이 없다”며 “지난 2008년 송정역사공원내 삼일운동기념탑, 이북5도민망향탑 등이 울산시문화재위원회 심의결과 제외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시 관계자도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 설치에 대해 아직까지 구체화된 계획이 없는 상태라고 시인했다.

해마다 6월이면 호국정신을 일깨우며 이들을 선양하자던 울산시가 울산출신 재일학도의용군의 존재를 알고서도 이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호국선양이 구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울산에는 신불산공비토벌작전기념비, 호국위령비, 농소 순국전몰군경 충혼비, 대운산전적기념탑, 일가4형제 국가유공자 위령비 등이 있다. 그리고 울산대공원 현충탑엔 호국영령 위패가 모셔져 있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6·25 전쟁 당시 학도병의 출신학교에 명예선양비 건립을 추진키로 해 울산시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지식 선생은 “울산 출신의 재일학도의용군을 위한 참전비를 세워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것이 살아 있는 나의 의무이자 소망”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재일학도병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해 왔는 만큼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재일학도의용군 19 용사는 울산의 역사이자 살아있는 정신이며 자랑이기도 하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그 푸른 청춘들의 호국정신을 너무 오랜 세월 방치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직무유기며 울산의 또 다른 부끄러움이다.

호국영령에 대한 보상은 그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후손에게 그 정신을 물려주는 일인 만큼 울산출신 재일학도의용군의 참전 기념비는 울산의 새로운 역사 기록이 될 수 있다.
 

우지식 선생은 누구인가 <85·울산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

▲ 전쟁 당시 동경법정대학 2학년이었던 우지식 선생이 인터뷰 도중 회한에 잠겨 있다.

인천상륙작전 1진 참전
現 의용군 부·영지부장

재일학도의용군 중 유일한 생존자인 우지식(85)선생은 울주군 삼남면 신화리가 고향이다.

우 선생은 중남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6·25전쟁 당시 일본 동경법정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 선생은 1950년 9월 15일 제1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으며 이후 장전호 전투 등 다양한 전투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산지회장을 13년간 맡았으며 1992년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부산영남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재일학도의용군의 얼’ 편찬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시집 ‘조국사랑’을 발간하는 등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7년엔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목련장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게 6·25전쟁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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