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간절함으로 교감할 상대를 찾아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이 같이 교감할 상대로는 샘물보다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도 있고, 사랑하는 여인도 있다.
울산매일신문이 창간 21주년을 맞았다. 21년 세월속에 수없는 사람들의 온갖 사연들이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에 본지가 창간 21주년을 맞아 지역 일간지 최초로 ‘지상 토크쇼’를 게재한다. ‘지상 토크쇼’ 초대손님은 보기드문 우정을 50년 이상 지속해온 새누리당 울산시당위원장인 박대동 국회의원과 이재율 대한항공 수석기장이다. 이들 두분을 지난 16일 새누리당 시당에서 만나 오랜세월 변함없이 지속된 우정에 얽힌사연들을 들어봤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자주 떠올려지는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추억의 필름을 되돌려 어린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박대동 국회의원 : 이재율 기장은 지난 세월 나의 발자취를 제일 잘 아는 친구예요. 50년이 넘는 지기죠.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낸 지난 날들을 한번 돌아보면 참으로 재미 있어요.
▲이재율 대한항공 수석기장 : 우리는 울산에서 같이 태어나 울산초등학교를 나왔지요.
당시엔 울산 초등학교가 가장 알아주는 학교로 누구나 가고 싶어 했었죠. 우리 둘은 실질적으로 그때부터 함께 뛰놀고 공부하면서 가까운 친구가 됐죠. 그러니까 첫 인연은 울산초등학교 때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린 어린나이에도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꿈을 키웠어요.
▲박 의원 : 허 허, 이런 이야기는 막걸리 한잔 하면서 해야 되는데…

■박대동 의원이 본 이재율 수석기장
서로의 발자취 가장 잘 아는 50년 지기
지각 한번 하지않는 성실함 대단해
오늘의 기쁨 맛보게 된 원동력은 친구
-박 의원과 이기장께서 좋아한 여학생은 누구였나요.
▲박 의원 : 그건 비밀입니다.(웃음) 사실 초등학교 1학년 5반때 이선희 선생님을 많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미혼이셨는데 아주 예뻤어요.
여학생들도 그 때는 인기 있고 잘나가는 애들을 중심으로 모였거든.
그 중에서도 공부도 잘하고, 집안이나 외모도 출중한 그런 그룹을 중심으로 많이 모였지. 그런 애들을 대상으로 학교 주변에서 “누가 누굴 좋아한다”하는 소문들이 은근히 학교 내에 퍼져 있었어요. (웃음)
▲이 기장 : 박 의원은 중학교 입학과 졸업성적이 전체 수석은 물론 중학교때 선생님을 대신해 수업을 하기도 했지. 그러니까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서부경남에 천재가 울산에서 이렇게 태어났죠. 그 때는 어린 마음에 끼리끼리 모여 소곤거리기도 하고, 소문을 퍼뜨려 학교 전체에 쫙 퍼지기도 했어(웃음). 지금까지도 친구들의 술자리모임에서는 그때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누가 누구를 좋아했다고 하며 한바탕 웃으며 그 철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요… .
▲이 기장 : 난 공부는 그리 뛰어나진 않았는데 성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초등학교 6년 개근을 했으니까.
▲박 의원 : 그 때는 우등상이라는 게 있어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받는데, 개근상은 전교 수석을 했던 나도 못 받았거든. 이 친구는 개근상을 받았는 거야. 참 어려운 상인데 그만큼 성실하다는 보증 수표를 받은 거죠. 6년 개근상은 전근상 하고 달라서 지각해도 안되는 상이거든. 그러니까 현재의 항공기 기장 직업하고 맞다고 여겨져.
■이재율 수석기장이 본 박대동 의원
6·25전쟁 직후 울산초등서 만나
“안 된다”… 부정적 말 들어본 적 없어
언제나 결과서 타의추종 불허 ‘대단’
-박 의원께서 공직생활 중 이 기장의 비행기를 타고 가신 때는 없었나요.
▲박 의원 : 정확하게 20년 전인데 부인이 초등학교 4년 후배예요. 내가 아동장을 할 때 열중 쉬엇, 차렷 하라면 시키는 대로 하던 사람이야(웃음)
친구는 국제선기장으로 국내 있는 기간이 1년의 절반, 해외에 있는 기간이 반정도 되다 보니까 이기장의 아내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늦깍기 유학을 가게 됐는데, 난 그때 서기관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던중 토플시험장에서 부인하고 같이 앉아 시험을 쳤지.(웃음) 이 기장의 아내는 울산학성여중에 수석 입학하는 울산의 재원이었죠.
그리고 여행 중에 실제로 조종석 접근이 안 되는데 애들한테 잠깐 구경도 시켜준 일도 있어. 막강한 빽을 가졌어요.(웃음)

-이야기를 사회생활 쪽으로 넘어가 볼까요.
▲이 기장 : 인생을 살면서 내가 박의원을 만난 것이 참 기이한 운명같기도 해요. 지난시절 박 의원으로 부터 ‘안된다. 잘못됐다. 불편하다’ 등 부정적인 말은 지금까지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는 박 의원한테 한두번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라는 의사표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7~8년 전에 박 의원이 금융감독위원회 국장시절 노무현 정권 3년차 즈음이었을 때 일인데, 어느 날 여의도 사무실에 갔더니 “이 기장, 여의도 열린우리당 쪽에서 국회수석 전문위원으로 왔으면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며 의견을 물었어요. 나는 한사코 반대하며 끝까지 만류했어요. 그래서 결국 못 가게 됐죠. 만약 그쪽으로 갔다면 친구가 지금은 울산에서 잊혀진 사람으로 기억됐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3년 전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있을 때 울산 북구에 재보선 선거를 하게 됐고, 박 의원이 예금보험공사 사장을 한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울산 북구에 가서 한나라당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가 있었어요. 그 때도 반대를 했죠. 친구는 예보사장 연임은 물론 더 좋은 자리로도 갈 수 있는 위치였거든요. 또한 친구가 정치를 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다는 나의 이기심도 발동 한거지요.
하지만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울산북구에 출마하게 됐지요.
-어릴 때 가난했던 서로의 추억 같은 건 없습니까
▲박 의원 : 제가 기억나는 건 이 친구가 꿈이야기를 한번 해준적이 있었어요. YS시절인데 그때 이 친구가 꿈에 내가 대통령하고 탁구를 치더라는 얘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정치를 한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그냥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 했죠. 그 꿈을 지금하고 연계시켜보면 아! 그 꿈이 일종의 현몽이였나 하고 생각하게 되죠.(웃음)
▲이 기장 : 내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게 이 친구한테 있는데 항상 좋은 일만 있겠어요. 살다보면 안좋은 일도 있게 되는데 그런 일들을 받아 들이는 자세가 어떤 경우라도 상대방을 나쁘게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모든 주변환경을 받아들이는 성품이죠.
-친구 부인에 대한 평가를 해볼까요.
▲박 의원 : 이 친구의 부인을 딸의 이름을 빌려 ‘소미엄마’라 부르는데, 굉장히 직선적이고 옳고 그름이 확실해요. 제가 볼 때는 상당히 예지력같은 것이 뛰어 난다고 할 수 있어요. 부인에게는 내가 신랑 친구도 되고 선배도 되니까 그런지 몰라도 제게 늘 응원자이면서 서포트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이 기장 : 박 의원의 큰 딸이 효원인데 ‘효원이 엄마’라고 편하게 호칭을 해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공무원의 아내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그냥 못 보는 ‘나눔의 실천자’이지요. 나는 지금까지 우리집 아내보다도 더 편하게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지요. 가족같은 사람입니다.
-서로의 자식농사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박 의원 : 이 기장 딸(소미)이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인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의 유망한 애널리스트이며 올 가을에 MBA입학 예정입니다.
작년에 심장외과 전문의와 결혼했는데 나의 조언과 허락(?)을 받았지요.
▲이 기장 : 박 의원은 딸이 둘이 있는데 모두 아빠를 닮아서 공부를 잘해요, 큰딸(효원)은 서울의대를 졸업해서 내과 전문의가 됐어요, 지금은 서울대 의대 교수가 됐고, 큰사위는 이비인후과 개업 중에 있어요. 둘째(효정)는 전업주부로 있고 둘째 사위는 서울 음대 교수입니다.
-서로 만나 가끔 약주 한잔 하시나요.
▲이 기장 : 많이 하죠. 3년 전 재보선 낙선 이후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속에서 무척 힘들어 했고, 나 또한 친구를 지켜보며 울산 북구 강동 바닷가에서 겨울의 삭풍과 비바람을 맞으며 복잡한 문제 속으로 빠져들어가본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 같은 시련의 시기가 우리가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간들로 기억돼요. 이럴때는 언제나 막걸리 한잔과 함께 회포를 풀기도 했어요.
▲박 의원 : 북구 보궐선거에서 낙선했을때가 아마 제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저 뿐 아니라 이 기장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선을 치렀고, 주변환경도 그렇게 녹록치 못했어요.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요행을 바랬던 거죠.
▲이 기장 : 그 때 제가 선대본 해단식을 하면서 박 의원 뒤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아픔이야 말할 수 없죠. 본인이야 오죽 했겠어요. 그때 나는 다짐했죠. 앞으로는 어떤 고난도 해쳐 나가며 두 번의 실패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죠.
▲박 의원 : 그 당시 힘들었던 것은 북구가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어려운 지역구였고, 여러 가지 상황이 불확실 하고 승리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 하기가 어려워 더더욱 힘들었지. 서울 강남지역 같으면 기대치가 높았지만 이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 때로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입장에서는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자세로 왔지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 길인지에 대한 의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장 : 내가 느끼기로 그 당시 주변에 기대치도 있고 나도 그렇고 당사자도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모든 걸 팽개치고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내모든 것을 걸고 한번 내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더 물러설 수 없었던 거죠. 마지막으로 박 의원에게 부탁이 있다면, 지금까지 국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약자, 그리고 특히 울산의 근로자들에게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박 의원 : 저도 실패 하더라도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만큼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고 했는데 나의 친구와 당원동지 등 안타까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헌신적으로 도왔어요. 그것이 오늘의 기쁨을 맛보게 된 원동력이지요.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