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이 들면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뭍이 되는 ‘서망’도 오래지 않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고향 그리는 애틋함 묻어나는 ‘망향비’
황암·용연·화동옛터비에 새겨진 애환
마을사람들의 옛 추억 회상 가슴 뭉클

생명의 땅·새들의 보금자리 ‘처용암’
물 들면 섬, 물 빠지면 뭍이되는 ‘서망’
일행들 명당서 뜻밖의 호사 누려

걷는다는 것은 어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머무는 일도 아우른다. 쉬어가는 일 또한 걷는 일이다.
해안길을 걸으면서 예기치 않게 11월의 마지막 토요일인 24일은 이어 걷기보다 실향의 흔적을 찾아 맴도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시간이었다.

이날은 특별히 황암이 고향인 사진작가 조경명씨가 길안내를 맡아 망향의 흔적을 일일이 더듬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용암 인근에서 오래 생활하다 다운동으로 이주한 이재구씨도 처용암 일대를 배로 안내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성암근린공원에 세운 망향비였다.

울산시청을 출발해 SK에너지(주) 울산 Complex 정문 앞을 지나 처용로로 접어들어 성진지오텍(주) 옆 도로로 한참을 달려 다다른 성암근린공원은 용연공단 어귀에 보물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 성암근린공원에 세운 망향탑.
이 곳 성암근린공원은 고향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이들의 애환을 달래고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울산시 남구 용연동 산 145번지 일대에 38만605㎡(공원시설 2만694㎡, 녹지시설 35만9,911㎡)의 부지에 망향정과 전망대, 다목적운동장, 망향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가운데 다목적운동장과 망향탑만 공사를 끝내고 나머지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1975년 2월 19일 도시관리계획(공원) 결정에 이어 같은 해 12월 5일부터 1977년 1월 11일까지 공원조성계획 수립 및 결정 고시되면서 공원조성사업의 토대가 마련된 성암근린공원은 2008년 9월 10일 망향탑을 세웠다.

망향탑은 여천리 매암리 고사리 용잠리 용연리 남화리 황성리 성암리 부곡리 상개리 등 실향민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고향 마을 이름을 아로새긴 옆에 실향민인 심수향 시인의 시를 서예가 유용하가 쓴 <망향탑을 세우며>가 애틋함을 전하고 있다.

-개운포에 구름 걷히면/처용암을 품은 눈 시리도록 푸른 고향바다/그 바다 춘도에 동백꽃 불붙듯 피면/하얀 배꽃이 눈꽃처럼 날리고/주먹만한 배가 주렁주렁 열리던/매임 여천 고사 부곡 상개 성암 황성 용연 남화 용잠 내고향//조국발전과 공업도시로 태어나는/울산을 위해 공해에 찌든/사랑하는 고향을 두고 떠나간/3만여 10개동 그리운 얼굴들/어느 하늘 아래 어떻게 살고 있나요?/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마음들이/바다가 보이는 이곳에/망향공원을 마련하고/망향의 탑을 세웁니다/우리 모두 고향인 듯 반가이 찾아와/소중한 뿌리를 가르치고/한 줌 한이라도 풀고 가시기를/한 마음이 되어 빕니다//

잠시 늦가을 햇살을 받으며 망향탑에 아로새겨진 시 구절을 혼자 읊조려본다. 시간을 거슬러 70년대 중반의 11월 어느 하루 세죽마을을 찾아온 듯했다.

모처럼 고향 마을을 찾은 조경명씨는 호젓한 산길을 걸어 망향정이 세워질 예정인 곳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옹기종기 모여살던 사람들은 간 곳이 없고 대신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조경명씨는 공원 조성사업이 더뎌지고 있다며 예산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져 하루빨리 망향정과 유물전시관이 들어서 바다사람들의 애환이 남아있는 각종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망향비를 뒤로 하고 황암옛터비로 향했다.

▲ 옛 제당자리에 세운 황암옛터비.
현대중공업 용연공장 부지에 포함된 제당 자리에 2001년 11월 11일 세운 황암옛터비는 황암(황바우)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곳에 조상이 기틀 튼 때는/아득한 옛날부터/산 좋고 물 좋은 천혜의 바다와 땅/1999년 우리는 이땅을 떠났다/그리고 이제 이곳에 국가 동력의 원천/맥박처럼 고동치던 파도소리/피속에 녹아든 갯내음/햇살에 빛나던 봉대산/천년을 흘러내린 가리못/깎이고 매몰돼 다시 볼 길 없구나/보고싶은 그 얼굴, 듣고 싶은 그 목소리/어디에서 만날까//황바우 내 고향이여/너를 잃은 아쉬움과 서러움을 여기 묻노니/실향의 눈물이 헛되지 않게/산업의 열매를 알알이 맺어다오//오직 한 그루 남은 당산 소나무여/향우들의 뜻을 모아/옛터비를 네 곁에 세우니/훗날 고향 그리워 찾아오거든/세월의 더께에 가물거리는/추억을 일깨워다오-

황암옛터비는 비문에 새긴 글귀처럼 제당은 자취를 감췄지만 당산소나무가 황바우 사람들의 추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황암옛터비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용연옛터비가 서 있었다.

용연옛터비는 장생포 양죽마을부터 만난 옛터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주변은 공원으로 단장돼 있었다. 그러나 소공원으로 조성했지만 지금은 찾는 이의 발길이 드문 지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일행은 철제 울타리를 넘어 공원 안으로 들어가 김송태·장정국이 글을 짓고 서예가 이영상이 쓴 옛터비에 알알이 새겨진 용연사람들의 고향사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 현대중공업 용연공장 인근에 조성된 소공원에 세워진 용연 옛터비.
-아득한 옛날부터 자자손손 대를 이어 지켜왔던/내 고향 용연 이제 정들었던 이 땅과 바다를/뒤로 하고 우리는 떠나야 한다. 유서깊은 개운포와 염포의 한가운데 가리산 기슭 동해가 바라보이는/이곳 바닷가에 삶터를 잡은 조상들은 우리에게/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옥토와 문화를 물려주셨다…<중략>

옛터비 가운데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지난번 해안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남화동옛터비였다.

2004년 5월 9일 이희우가 짓고 이영상이 쓴 ‘그리운 남화땅, 여기는 심포 사람들의 옛 고향입니다’로 시작하는 남화동옛터비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옛 마을 정경을 지도로 만들어 일일이 이름을 적어 놓아 애잔함을 더했다.
이 일대 옛터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것은 용잠옛터비였다.

지난번 해안길을 걸으면서 모르고 지나쳤던 곳으로 ‘龍岑옛터’라고 단아한 글씨로 쓴 용잠옛터비는 ‘여기는 용잠사람 옛 고향 땅입니다/돌아올 고향 없어 서러운/용잠사람들이/옛 고향의 숨결 잊지 말자, 사랑하자/그리워하자고 굳게 다짐하면서/공장 연기 자욱한 이 언덕 빈터에/애향탑을 세웠습니다…<중략>

▲ 용잠국민학교 설립자인 이종만의 공덕비와 나란히 서 있는 용잠 옛터비.
대형 트럭들이 무시로 오가는 도로 옆 빈터에 자그마하게 꾸민 동산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용잠옛터비 옆에는 1977년 폐교돼 아예 교명조차 남아있지 않는 용잠국민학교를 세운 이종만씨의 공덕비를 같이 세워 애틋함을 더하고 있다.

강남교육지원청에 보관된 용잠초등학교 연혁지에 따르면 1939년 1월 31일 이종만씨의 뜻에 따라 4교실을 신축하고 같은 해 3월 31일 용잠공립심상소학교 설립을 인가받은 데 이어 4월 25일 개교와 함께 41명(남자 37명, 여자 4명)의 입학식을 거행했다.

공덕비는 용잠초등학교가 폐교돼 지금의 SK가스 울산기지로 바뀌면서 1977년 해체, 1986년 9월 27일 장생포초등학교 교내로 옮겼다가 2002년 10월 27일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사람은 가도 육영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흔적은 남아 사람 키우는 일의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생각하니 공덕비가 예사롭지 않았다.

▲ 망향정 자리에서 내려다 본 전경.
용연, 용잠, 남화, 황암의 옛터비를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두 세 시간이 지났다.
바다를 떠나지 못해 다운동집은 거의 비워두다시피하고 처용암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재구씨는 일행을 위해 군고구마와 과일 그리고 가을볕보다 따사로운 커피를 내놓았다.

이재구씨의 도움으로 일행은 배를 타고 처용암까지 들어가는 행운도 누렸다.
처용암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안은 꽤 넓었다. 새들이 제 집 드나들듯 날아와 둥지를 틀고 맥문동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처용암은 돌틈 사이로 달래가 자라는 등 또다른 생명의 땅이었다.

이재구씨에 따르면 팽나무와 쥐똥나무 등이 자생하는 이곳 처용암에는 경주 최부자 아버지의 머리만 묻었다는 천하 제1명당이 있었다.
처용암을 이처럼 속속들이 둘러본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물이 들면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뭍이 되는 서망 가까이를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목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아랫목도 선착장에서 당시 춘도섬(지금은 목도)을 오가며 상춘객을 실어날랐던 목도호가 지금은 재덕4호로 이름을 바꾸고 기진맥진한 채 떠 있었다.
이씨에 따르면 올해로 건조된 지 52년째라고 했다. 

▲ 배를타고 가까이에서 본 처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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