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시언해 영인본 (자료사진) 연합뉴스 www.yonhapnews.co.kr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약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한글로 엮어 지을 수밖에 없다.(중략)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 나는 궤에 기대어 듣기도 한다.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 부르게 하고 스스로 춤추게 한다면 거의 세속의 더러움을 털어버리고, 감동 때문에 분발하여 마음이 트일 것이니, 노래하는 자와 노래 듣는 자가 서로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연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은 연유를 밝힌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우리 말 노래의 가치를 이같이 평가했다.

한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우리말만 한 게 없었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교수는 "조선의 사대부는 한글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했다"면서 "시조와 가사가 그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김인회 한중연 전임연구원과 공동으로 집필한 연구 논문 '조선시대 사대부의 한글사용과 의미'에서 다양하게 한글을 사용한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 논문에서 임 교수는 조선시대 한글이 부녀자, 아동, 한문을 모르는 남성 등을 위한 문자였다는 기존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한글 사용에 관한 기존 연구는 한글 사용의 주체로 중인과 아녀자를 상정하고 특히 여성의 한글 사용실태를 밝히는 것에 관심을 두어 왔으며 사대부는 여성이나 하층민 등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수동적이고도 임시적으로 한글을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했다"면서 그러나 이런 시각은 "실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대부들도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대표 사례가 한문 문헌 번역이다.

 

임 교수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두시언해' 등 번역서들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이나 배움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번역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자신이 독서하기 위해 번역한 것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또 한자의 정확한 음을 표기하는데 한글을 사용했다. 한자의 정확한 음이 무엇인가는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한자의 음과 성조는 한문으로 시를 지을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 편찬한 '동국정운'을 비롯해 '홍무정운', '규장전운' 등 한글을 이용해 한자음을 표시한 운서(韻書·한자 발음 사전)가 잇따라 편찬됐다.

임 교수는 "사대부들에게 한글은 생활 속에서 풍류를 즐기거나 공부를 하고 사전을 읽는 데 긴요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사대부들이 한글을 이용해 그들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아울러 그들의 세계관을 전파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의 주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사용자였다"고 결론 내렸다.

임 교수는 최근 한중연 한국학대학원에서 열린 어문생활사연구소 제3차 국내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새로운 관점, 색다른 시각에서 본 조선 후기 생활사'를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회의에선 '복식 장만과 관리를 통한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의생활'(전경목·이민주) '조선 후기 유언비어 사건의 추이와 성격'(고성훈) '조선후기 장시 발달과 농촌의 사회·경제생활 변화'(김대길) 등의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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