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온산국가산업단지 조성에 앞서 발굴된 연자도유적(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당월리)이 조사되기 전 울산에서는 고려시대 제철유적이 확인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손명조 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 학계전문가들은 그동안 통일신라~고려시대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철광산의 개발로 인해 울산지역은 상대적으로 그 기능이 약화된 것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연자도유적에서 유리질화가 많이 진행된 철재와 산화철 함유량이 높은 철조직, 철솥, 철제 용기, 철제 낫, 철추, 지석 등 제철과 관련된 유물이 확인됐고, 울산에도 고려시대 제철유적이 있음이 증명돼 앞으로의 추가적인 자료 확보 가능성을 높였다.
고려시대 관영·공납·민간수공업 철 생산
연자도유적서 고려시대 제철유적 확인
12∼13세기 지방호족·해양세력 치소 추정
조선전기 울산 둔기리·경주 문산리 철 공급
울산둔기리 단조철기 제작 용해·단야유적
달천광산 철광석 제련한 선철 소재 확인
1906년 달천광산 日 강탈… 토철채굴 중단
채광 철광석 협궤레일 이용 일본으로 운반
일제에 뺏긴 철, 군수물자로 되돌아와
◆고려~조선시대
전문가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울산지역 철 및 철기의 생산과 유통은 관영수공업, 공납수공업, 민간수공업 등 여러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관영·공납·민간 수공업에 의해 모두 철이 생산될 정도로 철의 생산과 유통이 다양화됐기 때문이다.
12~13세기대 지방호족이나 해양세력의 치소(治所)로 추정되는 연자도유적의 제철관련유물 출토양상은 이러한 정황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15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울산 둔기리유적과 경주 문산리유적이 있다.
둔기리유적은 무쇠 솥과 단조철기를 제작했던 용해·단야유적으로, 관련유물에 대한 금속분석에서 비소(As)가 검출돼 달천광산의 철광석을 제련한 선철을 소재로 사용했음이 확인됐다.
문산리유적은 단야공방지로, ‘경주장흥고’명 분청사기 등을 통해 15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편년되고 있다.
출토된 철편에서 비소가 검출돼 달천광산과의 관련성이 지적됐다.
즉 달천광산의 원료를 제련한 소재가 조선 전기에 울산 둔기리와 경주 문산리에 모두 공급됐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후기 유적으로는 울산지역 제철문화의 가장 특징 중 하나인 석축형제철로 유적을 들 수 있는데, 그 기원과 달천광산의 토철 사용, 발전양상 등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달천광산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독특한 제철문화이고, 구충당 이의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17세기경 개발되고 주변지역으로 확산돼 달천광산을 일제에 강탈당하기 전까지 막대한 양의 철을 생산해 중앙정부에 공납하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소비하기도 했으며, 영남지역 무쇠 솥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등 조선후기 울산지역 수공업의 큰 축을 담당했다.
한편 일본의 가고시마현 내에는 독특한 제철로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아치형의 석재를 쌓아 원료를 투입하기 위한 통로를 만들고 최정상부에 노(용광로)를 조성했으며, 노의 평면 형태는 네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사각형을 띠고 한쪽에는 송풍구, 반대쪽에는 불순물의 배설시설인 배재구가 있다.
이들 유적은 18세기경부터 조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점들이 울산 석축형제철로와의 유사점으로 일본학자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
흥미를 끄는 것은 가고시마 지역에는 17세기 이후부터 ‘치코우치(ちこ打ち)’라는 놀이가 유행했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전통놀이인 ‘자치기’이다.
이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놀이문화로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17세기대에 개발된 울산 석축형제철로가 가고시마 지역에 전파돼 현지사정에 맞게 약간 변화된 것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향후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관련학자들은 지적한다.
◆근·현대
1906년 4월 달천광산은 일본인 나카무라(中村俊松)에 의해 강탈된 후 토철 채굴은 중지되고 철광석이 채광되기 시작했다.
채광된 철광석은 협궤레일로 이동되는 일본 가시랑차로 천곡 가재골과 부엉디미, 상안들 앞 동천강을 통해 호계역·장생포항을 거쳐 일본으로 운반됐다.
대한철광개발㈜ 울산광업소에 근무했던 심강보 씨에 따르면, 1943년부터 1958년까지 정운경·김성택 등에 의해 수직 40m까지 착굴했으나 철광석 생산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가 갱도가 붕괴돼 남녀 2명이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시기 울산 달천광산의 철은 일제에 뺏긴 후 각종 군수물자로 되돌아와 우리 민족의 심장을 겨눈 아픈 과거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64년 대한철광개발㈜ 울산광업소가 발족돼 이때부터 1996년도까지 현대식 공법에 의한 막대한 철광석이 채굴됐다.
이후 달천광산은 2003년 4월 24일 울산광역시에 의해 시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으나, 주변에 아파트와 학교 등이 건립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중금속인 비소의 누출을 우려한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다른 곳의 흙으로 복토되기도 하는 등 원형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도움말·자료 제공=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권일 선임연구원)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대곡천 제철유적 6곳 발굴조사 울산최초 사례”
삼정리 야철지 석축형 제철로 첫 확인
천전리 비소 검출… 달천광산 원료 사용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은 “대곡천 유역은 산림이 우거져 원료인 숯을 구하기 쉽고 경주와 언양 간의 교통로에 위치하며, 달천광산에서 아주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철 생산지로 활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대곡댐 건설을 계기로 실시된 대곡천 유역 6개 제철유적발굴조사는 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로는 울산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대곡천 제철유적 6곳은 구미리의 대밀 야철지와 구미리의 양수정유적, 삼정리 야철지, 삼정리 유적, 천전리 방리 야철지, 천전리 유적 야철지이다.
이 중 삼정리 야철지에서는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인 풀무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발굴조사로 확인된 석축형 제철로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또 천전리의 방리 야철지와 천전리 유적 야철지에서는 비소(As)가 검출돼, 달천광산의 철광석과 토철을 원료로 사용했음이 확인됐다.
현재 대곡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천전리 방리 제련로가 이전, 복원 돼 있는데 이 제련로에 대해 신 관장은 “노, 즉 용광로의 구조가 중앙부가 높고 양쪽 끝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긴 석축을 가진 모양으로, 달천광산의 토철을 제련하던 울산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