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은 달천광산을 중심으로 초기철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나라 철산업의 요람이었다.
달천광산에서 생산된 철과 철기가 주변 여러 지역에 공급됐고, 국제적 교역품으로도 널리 활용된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달천광산을 중심으로 한 철과 철기의 교역은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삼국~통일신라시대, 고려~조선 전기, 조선후기, 일제강점기 등으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백제, 가야, 신라와 왜와의 교류관계가 시기적으로 복잡한 변화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울산지역 제철문화의 양상이 뚜렷하지 않으며 일제강점기는 전쟁과 수탈이라는 특수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원삼국시대와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두 개의 ‘울산 철의 길(Iron Road)’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원삼국시대
사로국 최대 철산지 달천광산 철 공급
예·왜·마한 무역에서 철을 화폐로 사용
달천광산 유통범위 한반도·일본열도 추정
조선후기
이의립 선생, 1657년 달천광산 재개발
달천철장 중심 경주 입실리·모화리
울산 대안·두동∼청도 운문 ‘쇠부리길’

◆원삼국시대 철의 길
초기철기~원삼국시대 달천광산은 기원전 2세기부터 3세기 대까지 채광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기원후 2세기 대까지는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에서 비소가 검출되지 않고 중산동고분군집단 세력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중산동집단에서 달천광산을 관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중산동집단의 세력권을 중심으로 더 상위집단(굴아화촌-屈阿火村 혹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을 통해 주변소국과 국제교역망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남지역 가장 이른 시기 제철유적의 하나로 평가되는 사천 늑도유적의 철 소재는 변·진 지역에서 공급됐으며, 울산 달천광산은 그 후보지의 하나다.
변·진한지역 중 경주, 울산, 밀양, 양산, 부산(동래)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철광산이 분포하지 않기 때문에 철광산을 소유하지 못한 소국들은 국제교역을 통해 철 소재를 수입해야 했다.
진한은 신라의 소국 병합 정황으로 봐 이들 소국 중 많은 수가 사로국에서 철 소재를 공급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로국의 최대 철산지인 달천광산의 철을 공급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3세기 중엽의 한반도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각각 “나라에서는 철이 나는데 마한·예·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나라에서는 철이 나는데 예·왜·마한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서는 철을 화폐로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위 내용의 변·진 철 산출지는 김해지역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울산 달천광산으로 보는 견해(문경현, 권병탁)가 힘을 얻고 있다.
김해에서는 이른 시기의 제철유적이 아직 조사되지 않고 있는 반면 울산·경주지역에서는 다수의 원삼국시대 제철유적이 조사되고 있는데다 3세기 사로국의 문헌적·고고학적 위상 때문이다.
이처럼 각종 고고·문헌자료로 보아 원삼국시대 달천광산 철의 유통범위는 진한 지역과 마한, 낙랑·대방, 예, 왜 등 북부지역, 변한지역 등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광역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유통경로를 추정한다면 달천광산을 기점으로 한 원삼국시대, 울산 철의 길(Iron Road)이 도출된다.

◆조선후기 철의 길
조선시대 달천광산은 원삼국시대에 이은 또 하나의 중흥기로 볼 수 있다. 특히「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은 당시 울산 달천의 철 산출량이 전국 최대 규모임을 전하고 있다. 15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울산 둔기리유적과 경주 문산리유적은 달천광산의 철을 이용해 무쇠 솥과 단조철기를 제작했음이 확인됐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달천광산과 관련된 대표적인 제철유적인 석축형제철로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해 문헌·민속자료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이다. 선생은 1657년 달천광산을 재개발한 이래 다양한 제철기술을 개발하고 각종의 철기를 제조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현종으로부터 달천광산과 광산의 경영·세습권을 하사받았다는 연구가 있다.
석축형제철로와 관련해 달천철장을 중심으로 경주 입실리·모화리, 울산 대안동·두동면을 비롯해 멀리는 청도 운문면에 이르는 ‘쇠부리길’이 울산과학대 이창업, 이철영교수에 의해 제시되기도 했다.
또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권일 선임연구원은 석축형제철로와 관련해 일본 가고시마지역은 시작이 울산보다 백년 이상 늦고 구조상 유사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달천광산에서 철을 생산해 주변지역 및 중앙정부에 공급하고 일본 가고시마지역까지 그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보면 조선시대, 울산 철의 길(Iron Road)을 유추할 수 있다.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
“우리나라 최대 철산업 중심지
울산제철문화 제대로 평가돼야”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사진)은 “달천철장을 중심으로 한 울산 제철문화가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다, 각종 개발로 그 원형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지금이라도 울산제철문화가 제대로 평가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달천광산의 가치와 역할은?
▲3세기 이후에는 사로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주변지역뿐 아니라 마한, 낙랑ㆍ대방, 예, 왜와의 국제적 교역망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주요한 산업기지 역할을 했으며, 이후 삼국~통일신라시대에도 국가의 중요한 기간산업 및 국제 무역품 산출지로서 기능도 했다.
-‘석축형제철로’라는 독특한 제철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조선후기 석축형제철로는 초기 자본적 공장제수공업으로서 근대 중공업의 기틀이 됐다. 이러한 제철문화는 일본 가고시마지역 석축형제철로와 유사성이 많아 이 시기 한반도와 가고시마의 문화교류상을 엿볼 수 있다.
-달천광산은 현재 울산이 산업수도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모태가 됐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채광된 달천광산의 철이 동천과 장생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됐고 이것이 각종 군수물자가 돼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총칼이 되기도 했으며, 오늘날 울산이 철강과 조선, 자동차 중심도시가 될 수 있게 했다.
-울산제철문화연구에 있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달천광산을 중심으로 한 울산지역은 국가형성기부터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철 산업 중심지로 기능을 했으나, 울산 제철문화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각종 개발로 인해 그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전통과학기술문화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울산 달천광산과 이를 토대로 한 제철문화의 기술사적 중요성이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