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과 경주 포항을 잇는 고속도로가 최근 개통되었다. 도로 개통과 함께 3개 도시는 이른바 ‘해오름동맹’을 맺었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이 지역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의미일 것이다. 3개 도시는 예로부터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중 역사와 문화는 3개 도시가 동일한 코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3개 도시의 역사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을 찾는 작업은 그래서 소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 모화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해오름 시대 문화유산’의 첫 탐방지다. 편집자 주
명랑 후계자·김유신 등이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 옛터 동서 나란히 남아있는 쌍탑
기단·몸돌에 십이지신상·사천왕상 조각
우아하면서 의연함… 빼어난 기법 자랑
1930년대 日 교토대 노세 우시조 복원

지진과 태풍 등 연이은 자연재해에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반나절의 폭풍우가 멈추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청명해졌다. 문득 지난 주말 다녀온 원원사(遠願寺) 의 삼층석탑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원원사 삼층석탑은 울산과 경주의 경계인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자락에 있다. 모화는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역이다.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경주시 중심부와는 달리 모화는 현재 산업단지로 개발되면서 산과 들이 속절없이 파헤쳐지고 있다.

◆경주~울산 접경에 세워진 호국사찰
모화는 도성 전체가 불국토나 마찬가지였던 서라벌에 들어가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그 머리털을 태운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모화를 거치는 울산에서 경주로 이르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교통로다.
신라시대에도 무역항이던 개운포를 통해 들어온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이 길을 따라 신라의 수도 경주로 유입되었다. 특히 이 길은 왜구의 주요 침입 루트였다. 이 때문에 모화엔 관문성 등 국방 유적이 남아있다.
원원사지 삼층석탑 가는 길은 모화버스정차장 북쪽에 나있는 지하차도(동해남부선)를 통해서다. 모화 초입 계동교에서 우회전하여 개울 따라 난 길을 갈 수도 있다. 2km 남짓한 이 길은 지금 옛 정취는 다 사라져 버렸다.

불고기단지를 지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최근 축조한 소형댐이 나온다. 댐 주변으로는 펜션과 전원주택 건립을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길은 원원사 입구까지 이어져 있지만 호젓함과는 멀다.
현재 있는 원원사는 옛 절터 아래에 지어진 절집이다.
문헌을 보면 원원사가 호국사찰임이 분명해 보인다. 원원사는 신라 현승 명랑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스님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죽지랑의 아버지) 등 국사를 논하던 중요 인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절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당나라가 50만 군대로 신라에 쳐들어오자, 문무왕은 채백(彩帛)으로 급히 절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명랑법사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을 행하게 한다. 그러자 갑자기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게 된다.
이 명랑법사가 우리나라 신인종(神印宗)의 조(祖)가 되다. 명랑법사가 위기에 처한 신라를 비법으로 구했듯, 김유신 등도 언제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이 절을 발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탑에 다른 불보살상보다는 사천왕과 십이지신을 신주(神呪)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원원사 터에는 계곡을 끼고 리어카 하나 다닐만한 길이 1킬로미터 가량 이어지는 옛길이 있다. ‘김유신이 말 타고 다니던 길’이라고 부르는데, 계곡이 끝나는 능선에서 석굴암이 보이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석굴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로 바다에 면해있는 장항사도 호국사찰의 지세이다. 산 넘어가 바로 감포이고 여기엔 동해 호국용이 되리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다. 기림사도 호국불교 가람이다. 온통 호국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절들이 서라벌을 위호했던 것이다.
◆조용한 미소를 띈 사천왕상
원원사 옛터에는 삼층탑이 동서로 나란히 2기가 남아 있다.
1930년대에 일본 교토대 고고학교실 조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석탑을 지금의 모양으로 복원했다(보물 1429호)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