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민속지 조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조사방법은 문헌조사, 참여관찰, 인터뷰이다.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장기 현장 조사가 아니면 현장 인터뷰로 얻은 자료가 민속조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자료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수집한 자료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개인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하지 않아도 부풀려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심지어 특정한 상황에 관해 한 개인의 기억은 다른 개인의 기억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한 개인의 기억도 인터뷰마다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사자는 인터뷰를 통해 수집된 자료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 과정에서 문헌조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문헌조사가 민속조사에서 전부는 아니다. 문헌에서 얻은 자료들은 정제되고 단편적인 기록이며, 삶 일부분만을 담고 있어서 인터뷰나 참여관찰로 수집된 자료를 비교해서 해석해야 한다. 

 농소에 살던 학성 이씨 이득곤
 윗마을 양씨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는 고씨 집안 가산
 3남 이윤고가 ‘외손봉사’하면서
‘수령 450년’ 팽나무 조성 추정
 대를 거듭해 살며 주요 성씨로

 

학성 이 씨 입향조가 입향한 터.현재는 후손에 의해 달곡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 고 씨 집안에 장가 든 이득곤

구술에 따르면, 달곡마을에는 두 성씨가 들어오기 전에 다양한 성씨가 살았고, 그중 한 집안이 제주 고 씨였다. 그런데 이 제주 고 씨 집안에는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하나 두었다. 그래서 당시 농소에 살던 학성 이 씨의 이득곤(1583년생)이 이 집안에 장가들어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의 3남 이윤고(1618년생)가 외가인 제주 고 씨의 가산을 물려받아 학성 이 씨가 달곡 윗마을에 현재까지 살게 되었다. 

◆제주 고 씨는 아들이 없다?

달곡마을 살던 제주 고 씨는 고경륜(高敬倫)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작성된 <기유식장적>에서 확인된다. 

戶禮賓寺正高敬倫年伍拾貳戊午本濟州父參奉億秋祖忠順衛諶曾祖行淸河縣監岡壽外祖訓鍊主簿李德寬本慶州妻楊氏年肆拾捌壬戌本淸州父內禁衛世淵祖幼學時曾祖成均生員克文外祖參奉蔣思仁本牙山妾良女崔召史年肆拾參丁卯本高山父正兵允祖別侍衛世傑曾祖甲士仁俊外祖正兵金仁孫本金海率子保人以寬年貳拾玖辛巳節現 
호 예빈시정 고경륜은 52세로 무오생이며 본은 제주이다. 부는 참봉 억추, 조는 충순위 심, 증조는 행청하현감 강수, 외조는 훈련주부 이덕관이며 본은 경주이다. 처 양씨는 48세로 임술생이며 본은 청주이다. 부는 내금위 세연, 조는 유학 시증, 조는 성균관 생원 극문, 외조는 참봉 장사인으로 본은 아산이다. 첩 양인 최소사는 43세로 정묘생이며 본은 고산이다. 부는 정병 윤, 조는 별시위 세걸, 증조는 갑사 인준, 외조는 정병 김인손이며 본은 김해이다. 솔자 보인 이관은 29세로 신사생이며 새로 등재한다.    <기유식장적> 고경륜

 

학성 이 씨 입향조가 입향한 터.현재는 후손에 의해 달곡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호적대장이 작성된 시기와 나이를 고려하면 고경륜은 1558년생이며, 당시 ‘고이관’이라는 29세의 아들을 두었다. 며느리가 확인되진 않지만, 2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의 아들을 두었음에도 학성 이 씨의 외손에 가산을 물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고이관은 1609년의 <기유식장적>에서만 확인되고, 이후 1672년 <을유식호적대장>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점에서 고이관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전히 그의 존재가 풀리지 않는다. 

◆제주 고 씨는 딸 하나?

한편, 이후 호적대장에서 이득곤이 고경륜의 집안에 장가든 점이 확인되지만, <기유식장적>에서는 이득곤에게 장가들지 않은 고경륜의 또 다른 딸이 확인된다. 

戶守門將朴銀福年肆拾參丁卯本蔚山父正兵銀同祖正兵銀山曾祖正兵承文外祖正祖[兵鄭德春本蔚山妻良女高召史年參拾壹己卯本濟州父禮賓正高敬倫祖參奉億秋曾祖忠順衛諶外祖正兵張彦進本慶州(이하 생략) 
수문장 박은복은 43세로 정유생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부는 정병 은동, 조는 정병 은산, 증조는 정병 승문, 외조는 정병 정덕춘이며 본은 울산이다. 처 양인 고소사는 31세로 기묘생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부는 예빈시정 고경륜, 조는 참봉 억추, 증조는 충순위 심, 외조는 정병 장언진이며 본은 경주이다.    <기유식장적> 박은복

이 호적대장에서 박은복의 처인 고소사를 살펴보면, 그녀의 아버지가 예빈시정 고경륜이다. 따라서 고소사는 달곡마을 제주 고 씨 집안의 또 다른 딸이다. 달곡마을의 제주 고 씨 집안은 무남독녀가 아니라 최소한 아들 한 명에 딸 두 명을 두었다.

제주 고씨와 학성 이씨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윗마을 당수나무.

◆왜 학성 이 씨가 제주 고 씨 가산을 물려받았나?

제주 고 씨 집안에는 최소 아들 1명에 딸을 두었음에도, 가산을 학성 이 씨에 물려주었을까? 이를 위해서 당사자들의 직역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경륜의 직역이 정3품 예빈시정임에도 불구하고, 고이관의 직역은 유학이 아닌 양인에 해당하는 ‘보인(保人)’이다. 보인은 조선시대 번상[番上, 번을 들 차례가 되어 군영에 복무하는 일]한 집의 가족에 재정을 도와주던 양인이다. 아마도 고이관의 직역은 모(母)의 신분을 적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경륜은 처 ‘양씨’와, 첩 ‘최소사’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씨’는 양반가의 여자를, ‘○소사’는 양인 여자를 일컫는다. 이러한 사실은 양씨와 최소사의 4조[부, 조, 증조, 외조]에서도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양인인 고이관의 어머니는 최소사로 추정되며, 이 때문에 가산이 학성 이 씨에 전해진 듯하다. 한편, 고경륜의 또 다른 딸인 고소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고소사로 기록된 점, 남편 직역이 수문장인 점은 그녀도 최소사의 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반대로 이득곤은 양씨 부인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그의 아들인 이윤고가 외가의 가산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주 고 씨 가산 물려받은 것은 외손봉사의 예

이윤고가 외가인 제주 고 씨 가산을 물려받은 것은 외조의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예이다. 일반적으로 조상의 제사는 적장자, 적손, 차자 순으로 아들이나 직계손자 순이다. 그러나 후사가 없을 때 여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사후봉사를 의뢰하기도 하는데, 제주 고 씨와 학성 이 씨의 사례가 그 예이다. 외손봉사는 고려시대 자녀 균분 상속제와 연결되며, 조선후기인 17세기 후반 적장자 상속제와 봉사제가 확립되기 전까지 두루 행해졌다. 

한편, 달곡마을에는 제주 고 씨 학성 이 씨의 이와 같은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증거물로 윗마을 당수나무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팽나무는 수령이 450년이 넘었다. 물론, 팽나무가 원래 심겨 있던 것인지, 새로 심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나무의 수령과 당시 거주자를 고려할 때, 이 당수나무가 제주 고 씨 가산을 물려받으면서 학성 이 씨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달곡 윗마을은 학성 이 씨가 대를 거듭하며 살게 되었고, 현재까지 달곡 윗마을의 주요 성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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