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여도(奎 10340)(1856~1861)  
 
   
 
  ▲ 기산풍속도 스왈론 수집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46쪽  
 
   
 
  ▲ 마골산 산길  
 
   
 
  ▲ 불당골 마애불상  
 

가) 부처님 어디가고 절터만 남았는데

부처님 어디가고 절터만 남았는데
이끼 낀 바위의 단풍잎은 붉게도 물들었네.

지나간 일 묻는 이 아무도 없는데
나그네 되어 가을바람에 앉아있네.

큰 화재 언제 입어 일찍이 없어졌나.
불가(佛家)는 본래 자고로 공(空)이라 하였다네.

석양(夕陽)만 홀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데
만고(萬古)에 산봉우리는 변함이 없네.

佛去遺墟在 蒼巖霜葉紅
無人問往事 有客坐秋風
?火何曾盡 禪門本自空
斜陽獨留照 萬古一峰同

위의 시 제목은 ‘불당 옛터(佛堂古址)’이다. 바람 부는 어느 가을날 ‘불당골’ 언덕에 홀로 앉아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돌아보면 이끼긴 바위 옆의 단풍잎은 곱게도 물들었다. 이 가을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라 쉽게 말을 한다. 하지만 늙은 몸으로 낮은 벼슬살이를 하는 외로운 나그네의 심정을 또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석양만 홀로 남아 빈 절터를 비추고 있는데, 지나간 세월을 알기나 하는지 만고(萬古)의 산봉우리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

결국, 위의 시는 이처럼 무심한 자연을 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불교의 교리를 통하여 인생무상(人生無常)과 대비하여 변함없는 자연을 노래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불당골’에는 절터가 남아 있었고 화재로 인하여 폐사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말하는 절터는 구체적으로 무슨 절을 말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열암사’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아직 지역에서는 ‘열암사’에 대한 연구가 없다. 한편, 울산의 고지도에서 열암사가 없으나 유일하게 동여도에는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열암사의 위치가 동축사의 위치로 추정되고 백련암은 월봉사로 추정되는 곳에 있어서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반면,『한국고전용어 사전』에 의하면

‘고려 시대 울산에 있던 사찰로 동대산(東大山)의 남쪽에 있었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은 박춘(朴椿)을 강제로 중으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겼다가 살해하였다.

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 승람』(1481년)에서도 ‘열암사(裂巖寺) 동대산 남쪽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1366년 8월 17일(음))에도 ‘이귀수(李龜壽)를 형벌로 머리를 깎아 송광사(松廣寺)에 두고 김귀(金貴)를 머리를 깎아 노산사(盧山寺)에 두고, 박춘(朴椿)을 머리를 깎아 열암사(裂巖寺)에 두었더니, 그 2년 후에 신돈이 사람을 보내어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찌되었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불당골이 ‘열암사’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불당골’에 있는 동구 마골산의 마애불상 또한 당시 ‘열암사’와 관련된 불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마골산 마애불상에 대해서는 이미 동구문화원에서 연구조사를 의뢰하여 연구서가 발표되었다. 조사 연구서에 의하면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는 높이 210cm 최대폭 160cm인데, 표면 풍화가 심하여 세부를 관찰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표면이 박락되어 버렸지만 불상의 높이, 너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여래불상의 높이는 133cm이며, 두고(頭高)는 29cm, 어깨넓이는 39cm이다. 따라서 마애여래입상으로는 소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곳 마애여래상은 남서향에 가까운 120°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이 불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몇 군데에 불가하지만 높은 육계에 갸름한 얼굴로 원래 ‘삭발형’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된 높이가 6~7cm에 달하는 얼굴 역시 표면이 많이 상하였으며, 특히 양쪽 눈은 인위적으로 쪼아낸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대의는 복부 아래에서 좌우로 나뉘어 Y자형으로 내려와 있으며, 무릎 부근에서 끝이 뽀족하게 마무리 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인과 여원인 즉, 통인인을 취하고 있지만 약지와 소지가 굽히고 있다. 한편, 양 발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양 협시보살처럼 바깥으로 벌린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별도의 광배조각은 없으며 불상 주위를 파내어 주형광배 형태를 띠고 있다. 발아래 대좌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식별하기 어렵지만, 불상의 양 발이 있는 위치가 마애면의 맨 아래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정된 위치에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의 존재는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의 자료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아래에는 137cm 세로 81cm 높이 60cm의 시멘트 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 남면에는 서기 1983년 10월 15일에 설치하였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한 시멘트단 양쪽에는 가로 세로 각각 10cm, 높이 40cm의 속빈 철제빔이 있어 이 마애불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처마나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애불은 이 불상과 관련하여 마애불이 제작되었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또는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8세기)와 영주 석교리 석불상(9세기)과의 천연성을 들어 9세기로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원 동축사 건물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동구가 아닌 것은 거의 정설로 되고 있는 점과 그 외 9세기경 신라시대에 이 사찰건립과 관련된 자료가 없는 점 및 풍화작용이 너무 심해서 그 형태에 대한 연구가 어려운 점 등으로 볼 때 불상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한국고전용어 사전』의 기록으로 볼 때 ‘열암사’와 관련된 불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고려후기에 조성한 불상으로 본다. 한편, 지역의 한석근씨는 이 절터를 과거 면학사의 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불상은 울산 유일의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상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풍화작용이 진행되고 있어서 보존대책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하고 예산을 투입하여 풍화작용을 지연시키는 화학처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주변지역을 정비하고 잘 관리하여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집에서 앉아 졸고 있으니 맑은 날은 길고도 긴데
봄날의 근심은 반쯤 남은 꽃잎 지는 것이네.

새들은 종류도 많아 소리도 다양한데
나무들은 늙어 천년되니 특이한 향내를 풍기네.

바라보니 꿍꿍이 싹은 언제나 나그네를 향하는데
꿈속 나비 되어 고향가고 싶어지네.

아득히 멀리 거닐어 깊은 골짝 찾아드니
폭포수 떨어지는 연못가에 옛 절터 남아있네.

坐睡高齋淸晝長 春愁一半惜殘芳
禽生百種多新語 樹老千年有異香
眼見?蕪常向客 夢爲蝴蝶豈還鄕
逍遙且可尋幽境 瀑落巖潭古佛堂

위의 시의 제목은 ‘불당골에서의 고향 생각(卽事)’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당골은 현재 남목 1동 뒤편 골짜기이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에 ‘이때에 불당동에 와서 놀기를 약속하였다.

’라는 설명이 있다.

아마도 어느 봄날 관아에 있다가 반쯤 남은 꽃잎마저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남은 봄날의 흥취를 느끼기 위해 ‘불당골’로 나들이를 가게 된다. 그런데 고향 떠나 천리의 나그네 되어 혼자 호젓하게 산길을 걷다 보니 고향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조용히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작자는「장자」에 나오는 우화처럼 꿈속의 나비가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나그네만 느끼는 심정은 아니어서 누구나 혼자가 되어 산길을 걷다보면 온갖 생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홀로 산속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고 오게 되면 지게의 무게만큼 옥죄어 오는 삶의 무게에 자신도 모르게 신세를 한탄하게 된다. 지역에서 구술 녹취한 ‘나무꾼의 노래’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후여 가마구여
지리지루산 갈가마구여
너도 또한 님을 잃구 임 찾아 가는 길에
울음울구
너를 건너이
나도 또한 님을 잃고
임 찾아 가는 길에
너를 보니
눈물생각 절로 나네
너 팔자나 내 팔자나
어이 그리 무정한고
짚신짹이도 짝이 있고
청천에 뜬 외 기럭도 짝을 맞차 가건마는
내 팔자 기박하다
헌챙이 같은 내 팔자여
무정하기
짝이 없다

보통 나뭇꾼으로 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장가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신세 한탄이 나무꾼의 노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울산 목장에서 담당해야 할 땔감인 시목(柴木)은 100근(斤)이었다. 〈경상도울산 목장리폐절목(1794년)〉에 의하면 감목관의 일용 땔나무와 숯은 7호로써 1통을 만들어 매 통마다 1냥을 거두었다. 그런데 울산 방어진 목장에서는 땔나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을 장기목장에 보내면 대신 숯 30석을 봄. 가을로 나누어 공납으로 울산 방어진 목장에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땔나무를 직접 담당하였던 방어진 목장의 경우 산에 가서 직접 나무를 해야 하는 부담이 많았다. 또한 과거에는 요즘처럼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호랑이 등의 맹수를 만날 가능성도 많았다. 또한 마사토로 되어 있는 가파른 산비탈을 걸어 지게로 땔나무를 지어 나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지역에서 땔나무를 준비하는 당시의 나무꾼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당시 홍세태의 경우도 이미 70이 넘은 나이로 이미 동생들과 모든 자식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게 되었다. 늙은 나이에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꾼의 노랫말처럼 ‘짚신짹이도 짝이 있고, 청천에 뜬 외 기럭도 짝을 맞차 가는데 가을날 헌챙이 같은 팔자’와 같은 외로움은 가난한 살림에 장가를 가기도 힘들고 나날이 위험을 안고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나무꾼의 삶과 같은 점이 많았을 것이다.

한편, 당시 불당골은 그의 말처럼 천년 묵은 고목은 특이한 향내를 내듯 오래된 고목이 있었고, 지금도 간혹 비가 내리면 제법 큰 폭포를 형성하는 폭포 옆으로 옛 절터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래된 고목이 있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는 아니다. 그리고 과거의 절터가 어디였는지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폭포 옆의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이 있는 곳 부근이 절터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것은 대나무 밭 주변을 살피면 오래된 기와 조각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터로 보이는 대나무 숲 아래에 계곡에는 폭포가 있는데 이곳을 만승골 폭포라 한다. 만승골 폭포는 동구 동부동의 김병식(金昞植)씨가 전한 자료에 의하면 과거부터 동구를 대표하는 명승지인 동면 8경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폭포 주변에 콘크리트로 갖가지 구조물을 설치하여 옛 정취를 찾아 볼 수가 없어서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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