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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울산여성독립운동 톺아보기’】(2)이효정(191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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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년 11월 6일 동아일보 기사로 이효정이 보성학교 교사로 일한 당시를 알려준다.  
 
   
 
  ▲ 1935년 11월 22일 조선일보 기사로 경성트로이카 참여당시 적색노조에 관련해 다시 체포당해 유치된다.  
 
   
 
  ▲ 1932년 동덕여고보 졸업앨범. 맨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  
 
   
 
  ▲ 이효정이 80세가 넘어 시집을 발간했을 당시의 모습(좌)과 아들 박진수가 새로 제본한 시집.  
 
   
 
  ▲ 이효정이 1935년 종로서에 체포될 때 찍은 감시 신상카드 속 사진 (이효정의 신상카드는 현재 2장이 남아 있다.)  
 
   
 
 

1.프롤로그

2.울산여성독립운동사를 시작하며


3.울산여성, 식민지를 살다

4.학교에 간 여성들

5.사회로 나온 여성들

6.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

(1)이순금(1912~?)

▶▶(2)이효정(1913~2010)

(3)손응교(1917~2016)



독립운동가 이효정에게 울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녀가 태어난 곳은 경북 봉화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어린 시절은 안동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선택한 만주 서간도지역 이주행렬을 따라 만주로 이주해서 살았다. 경성으로 돌아온 십대 학창시절은 경성에서 보냈고, ‘경성트로이카’의 조직원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던 곳도 경성이다. 해방이후 겪은 오랜 고난의 세월에는 대구, 경주, 마산, 서울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마지막 터로 인천 부평. 그 곳에서 2006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2010년 세상과 완전히 작별했다.

이효정의 삶 속 울산에서 머문 시간은 계산해보면 모두 합쳐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효정과 울산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었다. 누구보다 격랑처럼 요동치는 근현대를 관통했던 그녀에게 울산은 가장 행복했던 곳이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아프고 시린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뒤늦게 이효정을 삶을 되새기며 기억하려 애쓰지만 이 또한 온전히 가슴 벅찬 일이 아니다. 이는 울산 그리고 대한민국 전역에 깊게 새겨진 현대사의 상처를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30년 경성학생 만세운동에 나서다

이효정은 퇴계의 후손으로 뼈대가 굵기로 소문난 진성 이 씨 집안이다. 그리고 1896년 을미의병을 일어날 때 이효정의 증조부 이규락은 항일의병장으로 나섰고, 종조부 이동식, 이동하, 이경식까지 항일운동가에 독립유공자다. 요절한 아버지 이병룡의 사촌이자 이효정에게 당숙과 당고모가 되는 이병린, 이병기, 이병희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시인 이육사도 같은 집안에 멀지 않은 친척이 된다. 집안 어른들은 만주로 떠나 일부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드는 데 투신했고 또 다른 일부는 무장독립군에 투신했다. 이효정은 열 살이 될 즈음 다시 압록강을 넘어 고향에 돌아왔고 이후 경성 동덕여고보에서 학업을 이어 갔다.

삶의 첫 번째 분기점은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이 경성으로 번져서 이어진 1930년 경성학생만세운동 때였다. 문장능력과 서예실력이 출중한 문학소녀인줄 알았던 이효정이 항일운동에 적극 앞장서는 모습이 놀라는 교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후 동기였던 박진홍과 이종희 그리고 전학을 온 이순금 등과 단짝이 되어 동덕여고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32년 울산 보성학교 교사로 보낸 1년

동덕여고보 4학년 때 ‘경성RS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를 당했던 이효정은 졸업 직전 석방돼 학업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곧장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그녀의 동덕여고보 스승 이관술이 울산 동면 보성학교 교사로 일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이관술은 울주군 범서읍 출신으로 동면지역 독립운동가 박학규의 부탁을 받고 이효정을 추천했다.

보성학교는 민족사립학교로 동면지역 항일독립운동 근거지였다. 그리고 일제 경찰과 교육당국이 1929년 교사들의 불온하다며 폐쇄명령을 내릴 만큼 감시를 받았다. 이효정이 매우 낯선 땅인 울산으로 왔던 것은 이관술의 추천도 있었지만, 보성학교가 지닌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생활은 1년 만에 끝나게 된다.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불순한 교사라는 일제경찰의 낙인과 압박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에 청년 박두복(1914~?)과 인연이 생긴다. 연인도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아주 짧은 ‘썸’에 불과했으나 두 사람 모두 혹독한 옥고를 치룬 뒤 다시 만나게 되는 필연의 고리가 생긴 셈이다.



◆1935년 경성 적색노조운동 중 체포당해 옥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간 이효정은 사립강습소 교사로 일하면서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등이 이끈 경성트로이카(경성공산당재건그룹)에 참여했다. 경성트로이카는 항일운동의 중심에 노동자와 소작농을 비롯한 무산자계급이 중심에 서야한다는 원칙으로 적색노조운동을 이끌었다. 이효정은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방직공장 노동자들을 만나 학습하고 조직하는 일을 했다. 여고보 동창인 박진홍, 이종희, 이순금도 그 때 재회했다.

이효정은 공장 밖의 파업위원회 위원으로 속해 섬유 부문의 비밀연락을 맡던 중 체포돼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이 당시 종로서에 체포돼 찍힌 사진(일제강점기감시신상카드)을 보면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데 혹독한 고문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울산에서 만난 이들이 면회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 중에는 역시 경남적색교원노조 사건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박두복이 있었다.



◆1937년, 박두복과 결혼해 울산에 그리고 해방

이효정은 출소 후 박두복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우직한 시골 청년이라 여겼던 박두복은 울산과 경성을 여러 차례 오가며 마음을 얻어낸 것이다. 다음해 봄, 그녀는 홀어머니까지 모시고 울산으로 내려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지금으로 치면 동구 일산동 번덕마을이다. 둘 사이에 아이는 셋이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으며 살았던 시절을 그녀는 본인의 삶 속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로 기억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이 짙어질 무렵에는 시종조부 박학규와 함께 비밀결사로 조직된 건국동맹에 참여해 서울과 울산을 오가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에는 세상이 갑자기 변한 것처럼 이효정과 박두복 부부도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온 가족이 울산읍내로 들어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에 터를 잡아 살게 됐다. 남편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울산인민위원회에 핵심 간부로 참가했다. 그리고 이효정은 태화초등학교(현 울산초등학교)교사로 일하며 부녀동맹 책임자가 됐다. 해방된 나라에서 제 자리를 찾아 누구보다 바쁘게 보낸 때였다.



◆1947년, 울산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해

미군정이 남한으로 진주한 후 사회주의 계열은 점점 핍박을 받았다. 남과 북으로 나뉜 이념의 대결이 심화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고 항거했던 사회주의 계열은 해방 후 민중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았으나 점점 궁지에 물렸다. 결국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에 의해 체포되지 않은 이들은 월북하거나 야산대로 산에 올라갔다.

울산에서 먼저 떠난 것은 이효정의 남편 박두복이었다. 1946년 말 서울로 올라가 남로당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뒤 1947년 봄, 이효정과 가족들도 미군정 경찰들과 우익세력이 장악한 울산을 도망치듯 떠나 대구로 떠났다. 그리고 박두복은 남로당이 지하활동에 들어간 뒤 조직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된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이효정과 가족들은 대구에서 경주로 피난을 떠나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월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남편의 행방을 캐는 공안경찰을 항상 마주했다. 서울, 경남, 경기로 이사를 갈 때마다 귀신같이 찾아오는 경찰 방문. 큰아들 진수의 경우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안 살림이 보탬을 되려고 이른 나이에 노동을 시작했다. 결국 이효정의 가족들은 이후 40년 넘게 연좌제와 모진 가난의 굴레에 시달려야 했다.



◆2006년 광복절과 2019년 스승의 날

이효정은 팔순을 넘어 <회상>과 <여든을 살면서>라는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어느덧 증손주를 본 나이였다. 그리고 2006년 광복절,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때 이효정도 훈장을 수여 받았다. 아흔 셋 나이가 돼서야 ‘빨갱이’란 주홍글씨가 조금이나마 걷히고 ‘독립유공자’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광복절을 하루 앞 둔 날에 영면하였다.

이효정이 세상을 떠난 뒤 다시 9년 뒤, 2019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그녀의 아들 박진수가 울산교육청을 찾았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울산교육 독립운동을 발굴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선 ‘참스승’을 선정할 때 이효정이 포함된 때문이었다. 그날 이효정의 초상과 독립운동 내용을 담은 판넬이 울산교육청 로비 중앙에 부착됐다.

그리고 아들 박진수는 그 뒤로도 울산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어린 시절 이유도 모른 채 떠났던 고향, 누구하나 반기는 이 없던 울산에서 어머니 이효정을 계속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울산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전시회(2019), <울산여성의 독립운동>(2020, 울산여성개발원) 발간, 동구 일산동에 “보성학교기념관”(2021) 개관까지. 아직도 낯선 이들이 많겠지만 ‘이효정’이란 이름이 울산 곳곳에서 호명되기 시작했다.

이효정이 생전에 울산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도 눈물 나고, 만나 뵙지 못한 것도 죄송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고 느낄 때가 가장 빠른 것처럼. 물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저 송구함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어두운 상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우리 앞에 할 일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울산노동역사관 배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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