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근 편집국장
불교계가 시정잡배들이 모인 장바닥보다 더 시끌벅적하다. 내일 모래가 불기(佛紀) 2555년이라는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오늘은 또 무엇이 터질까 하는 마음으로 승속(僧俗) 모두가 조마조마하다. 선승(禪僧)들은 불자들을 차마 낯부끄러워 볼 수 없다며, 더 깊이 몸을 숨기고 있다. 울산의 어느 사찰 신도회회장은 “이러다가 부처님 오신 날 법문을 해 주실 큰스님 한 분 없는 것 아니냐”며 혀를 찼다. “밥알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던 성철 스님이 있었다면 뭐라고 하실까. 아마도 “절밥 그만 먹고 당장 산문을 나가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구도자(求道者)의 출발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에서 비롯된다. 그렇지 않을 바에는 먹물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불자나 일반대중이 사찰(寺刹)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속의 끈을 끊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을, 무욕(無慾)으로 마음공부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에 비춰보고 잠시나마 아생(我生)을 잊고 싶어서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상식(常識)으로는 그렇다. 술을 먹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속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만다라’영화에나 나올법한 극히 예외적인 소수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한 스님의 폭로로 드러난 불가의 맨얼굴은 범부들조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난장판이다. 당대의 학승이자 선승으로 불교계는 물론, 일반에도 사표(師表)가 됐던 효봉(曉峰) 선사가 닭 벼슬보다 못한 것으로 알고 멀리 했던 ‘절집 벼슬’에 목을 매고 있다. 중앙종회는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산문마다 방장과 주지 자리를 놓고 피 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폭로전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미계를 받고 구족계를 받던 행자들의 청정(淸淨)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스님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탐욕(貪慾)의 화신들만이 절집을 휘젓고 있다. 이번 폭로전의 발단도 자리싸움에서 일어났다. 백양사의 차기주지(住持) 인사권을 갖게 될 방장에 누가 추대할 것인지를 탐색하기 위해 설치한 몰카에 스님들 도박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당초 목적했던 바는 아니지만 대세에 밀리고 있던 파벌로서는 이것으로 반전을 노려 터뜨리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자 폭로 당사자에 대한 조계종총무원 차원의 대응도 실로 가관이다. 종단은 폭로 스님을 ‘스님’이라는 호칭도 생략한 채 속가 이름을 거명하며 융단 폭격했다. 비구니 스님 성폭행미수, 폭력, 횡령, 사문서위조 등 파렴치범의 당사자가 종단을 허위사실로 음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반격인 셈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자충수에 지나지 않았다. 불교 전체가 똥물을 뒤집어쓰는 역풍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문이 어찌 저럴 수 있느냐는 것은 폭로스님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님 모두를 도매금으로 인식하게 했다. 폭로와 고발이 반복되자 불교계 안팎에서는 “이러다 공멸한다”는 위기감과 함께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고, 대대적인 쇄신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반발도 만만찮다. 이는 반(反)불교적인 조직문화가 너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어,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현이다.

한국불교는 중국에서 넘어올 당시부터 귀족불교로 출발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특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신라에서 왕자들 가운데 왕위를 얻지 못하면 승려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할 정도로 불교의 성장에 왕권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됐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했던 조선시대에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 맥은 유지됐다. 일반 백성에게는 불교를 금하면서 왕가에서는 궁궐에 몰래 불단을 모시는 등의 방법으로 불교에 집착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 같은 불교의 맥이 중앙종회니 산문회의니 하는 것으로 답습돼 현재의 고질적인 귀족불교를 잉태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노동현장에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불가에서는 오히려 더 심각하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주류세력에 포함되지 않으면 낭인 신세나 다를 바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에 사찰 내 모든 인사권과 재산관리권을 독점하는 주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이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불교의 환골탈태는 요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절밥 먹는 것도 백이 있어야 한다니,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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