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태왕께서 붕어하신지 어언 160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374년에 나시어 391년에 고구려 19대왕으로 즉위하셨고, 412년에 돌아가시니 춘추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첫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달여 전에 저는 처음으로 태왕님의 비(碑)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한한 영광이요, 그저 감읍할 뿐이지만 제가 이렇게 태왕께 헌사를 올리게 된 이유도 그날의 알현에서 비롯됩니다.
태왕의 휘(諱)는 ‘고담덕(高談德)’이며,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나라의 위상을 북두성과 같이 높게 올리시고, 땅의 경계를 허물어서 영토를 크게 넓히시어 나라를 평안케 하신 어질고 큰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썼으니 ‘영락태왕’이 마땅하나 후세 사람들은 ‘광개토태왕, 광개토대왕, 호태왕’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한(韓)민족의 국조이신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인 조선을 세우신 때가 기원전 2333년이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고조선이라 부릅니다. 요하를 중심으로 만주지방과 한반도 일대를 영토로 하여 나라를 세웠지요. 그 옛날의 고조선 땅은 세월이 흘러 한때 크게 5호(五胡) 16국을 형성하던 그 시절에 우리 민족들이 세운 국가는 부여, 동예, 예맥,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등이었습니다.
한(漢)나라가 동진정책을 펴면서 옛 고구려 땅에 낙랑 등 4군을 설치하고, 요하지방을 광범위하게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 무렵 군웅 할거하던 북방민족들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리던 고구려는 부침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태왕시대를 맞았습니다. 증조부인 미천왕 시절에 철천지원수이던 낙랑을 산서성 장안으로 밀어내고, 400여년 만에 그 옛날의 땅을 수복하고는 고구려의 중심을 요하지방에 두었지요.
태왕의 조부인 고국원왕 때 후연의 공격을 받아 굴욕을 당한데다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왕고(王考)께서 전사하셨지요. 백부인 소수림왕 때는 거란의 공격을 받아 위난을 당했고, 선고(先考)인 고국양왕 때도 고연(高燕)전이 이어졌습지요. 태왕이 즉위한 후에는 거란, 후연, 동부여, 숙신을 완전 제압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를 굴종시키고 왜를 몰아내는 등 강역을 넓힌 것은 통한의 아픔을 씻어 내고자했던 절치부심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이후 아들이신 장수왕 때도 고구려의 위엄과 힘을 온 세상에 떨쳤습니다. 고조선에 이어 대륙사의 큰 줄기를 이어갔던 고구려는 700년 이상 건재한 최장수국가였지요. 그 뒤로도 발해와 고려가 고구려의 맥을 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고구려를 우리 조상님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기록이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만저만 엉터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 요하 근처에 있던 요양이라는 것이 분명 여진족의 금사(金史), 거란족의 요사(遼史)에 나온단 말입니다. 낙랑은 요동지방에 있었으며, 고구려 후기 수도도 요하 근처의 요양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증주의를 운운하는 자들에 의해 폄훼의 정도가 말이 아니니 이를 어찌하리오. 요즘은 또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네들의 북방 소수민족들 정권으로 오도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태왕님의 비도 처음 발견 된 것이 겨우 130여년이 조금 넘었는데 아무래도 1500여 년 동안은 다른 곳 어딘가에 서 있다가 옮겨진 것 같습니다. 처음 발견 당시 대석이 없었고, 비신의 윗부분도 관석을 얹기 위해 가공한 것 같거든요. 뿐더러 그 동안 엉터리 사학자들이 고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 같아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선생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고구려는 까마득한 그 옛날이지만 태왕님을 기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후손 중 누군가가 큰 지혜를 얻어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한다면 태왕님의 그 웅혼한 기상이 다시 살아날지요. 아 위대하신 태왕님이시여, 아둔한 후손들을 굽어 살피사 영명한 지도자를 내려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