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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남자현 의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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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호 다전초등학교장·수필가
  • 승인 2013.08.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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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다전초등학교장·수필가

최근 몇 년간 여성들의 활동여건은 확연하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지나온 역사 속에서 늠연히 서있는 여성들은 각별한 존경심을 갖게 한다. 그런 여성들의 대개는 여성성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나 그런 틀조차도 깨트리면서 열혈 독립운동가로 우뚝 서 있는 여걸이 계신다. 어떤 사람보다도 톺아보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할 그녀의 휘는 ‘남자현’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은 그녀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2등급 훈장)을 수여했다. 현재 독립운동 서훈자는 총11,683분인데 그 중 여성은 216분에 불과하다. 여성서훈자 중 남자현 의사는 유일하게 전체 서훈자의 1% 이내인 대통령장(종전 복장)을 받았다. 여성 의병장 윤희순, 영원한 누나 류관순, 독립운동가의 대모 곽낙원, 독립운동가이면서 페미니스트였던 김마리아 모두 서훈 등급이 3등급 이하였다. 그런 남자현 의사를 역사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만 세월이 그의 공적을 마모시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미 여러 차례 의사의 일생이 소개된 바는 있다. 순국 이듬해였던 1934년 1월에 조소앙이 ‘여협 남자현전’을, 1946년 3월에 아들 김성삼이 동아일보에 ‘나의 어머니 남자현’을, 1956년에 독립운동가열전에서 ‘남자현여사 약전’을, 2012년에는 이상국이 쓴 ‘남자현 평전’이 나왔다.


의사는 1872년 경북 영양에서 반가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고제 김영주와 결혼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이 일어나자 아버지 남정한의 70여 제자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남편은 영양, 봉화, 삼척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896년 7월에 전사했는데 이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25세에 청상이 되어 유복자인 외아들의 양육에 미망의 삶을 바치면서 시부모도 극진히 봉양하였다. 외롭고 힘든 삶을 이어가던 의사는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의식을 새롭게 한다. 당시의 교회는 계몽운동이나 독립운동의 고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9년 초에 시국 소식을 접하게 되자 상경하여 3.1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니 의사의 나이 48세였다. 이 사건은 홀몸이 된 이후 23년간 보통 여인의 생활을 접고 만주로 망명하면서 순국하기까지 14년간 열렬한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인근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등 큰 선비들의 집단 엑소더스와 친정아버지 제자들의 만주행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만주란 어떤 곳인가. 침략과 전운, 마적단, 아편, 밀정 등 언제, 어디서 폭력이 덮칠지 모르는 야만의 땅이었다. 그러나 나라 잃은 사람들에게는 저항이 숨 쉴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었다. 독립지사들은 그런 땅에 가기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다. 의사는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1920년 가을 청산리전투의 유일한 여성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또한 군자금 모집과 무장독립운동 단체 통합, 독립운동가의 옥바라지 등에 바빴다. 국내에도 두 차례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13곳의 교회와 20여개의 여성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했다. 이때의 교육이란 독립정신교육, 문맹퇴치, 중국어교육 등이다.

만주국 건설이 가시화되자 일제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필요했다. 의사는 쉰이 넘은 나이에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나섰다. 나이 많은 여성이기에 일제의 허를 찌르기에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듣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원’을 써서 조사단에게 전달하기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만주국 건설 1주년 행사(1933)에 일본대사를 처단하기위한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자 단식을 결행해 순국했다. 그날이 바로 80년 전의 1933년 8월 22일이었다.

의사는 절명 직전에 감춰둔 행랑에서 돈 249원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 200원은 나라를 도로 찾게 되면 정부에 광복 축하금으로 바쳐라. 남은 돈은 친손자(김시련)와 친정 손자(남재각)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여라.” 아들(김성삼)은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했다. 1946년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광복 축하금이 임시정부 요인(조영원)에 의해 전달되었다. 손자 둘은 모두 할머니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에서 교직에 헌신했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어떤 남자보다도 결기 있고 강단 있는 여걸이었다. 그래서 ‘만주의 여호,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대모’ 등 여러 가지 별칭이 따랐다. 의사님은 우러르고 또 우러러도 과함이 없고, 존경하고 또 존경할 만큼 위대한 선인이시다. 지금도 여전히 남자현 의사의 투혼은 우리들이 이어받아야 할 고귀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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