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근 편집국장

지난 8일 새벽, 슈퍼태풍 하이옌이 상륙한 필리핀의 휴양도시 타클로반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순간 최대풍속이 시속 375㎞에 이르는 강풍과 해일이 섬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다. 집과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수천 톤급 선박이 지상으로 떠밀리며 모든 것을 쓸어갔다. 세계태풍관측이 실시된 이래 최고 태풍으로 기록된 하이옌의 위력은 섬의 지도까지 바꿔놓았다.

사상자와 실종자가 1만명을 넘고, 가족과 친지의 행방을 찾는 절규가 빗발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시신을 담을 포대가 동이 나고 응급조치를 위해 마련한 야전병원 등에는 팔 다리가 떨어진 중환자가 넘쳐난다는 보도가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영국, 일본 등 선진 각국은 인력과 장비, 복구비를 긴급 투입하며 인명구조와 복구에 구슬땀을 쏟고 있다.

특히 사상최악의 쓰나미를 겪었던 일본은 마치 자신들이 당한 재난인 냥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태풍발생 당일에 1,000만 달러 무상지원과 함께 자위대 50명을 긴급 파견했다. 일본은 이어 항공모함급 호위함 3척과 1,000명의 자위대를 추가 파견하기 위한 각의를 소집하는 한편으로 필리핀에 진출한 자국기업들에게도 복구지원에 나서 줄 것을 독려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복구지원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이 교민과 여행객의 안전 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교민과 국민 숫자도 시시각각 달랐다. 첫날에는 20여명이라 했다가 이튿날에는 40여명, 또 10여명 등으로 수정 발표하며 국민신뢰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필리핀 현지에서의 참상(慘狀)에 대한 애도와 인류애로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은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태풍발생 나흘이 지나고서야 필리핀에 무상지원금 500만 달러를 주기로 결정했다는 외무부 발표가 나왔다. 그것도 필리핀 정부가 공식 요청한 식량, 의약품 등 현물지원 등을 포함한 액수다. 부상자치료와 피해복구를 위한 구조대, 의료진은 얼마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없다.

미국과 일본 등이 태풍발생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구조대와 의료진을 긴급 투입한 것과 비교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특히 필리핀은 우리와 혈맹이자 영원한 우방국가라는 점에서 더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필리핀은 유엔참전국의 일원으로 총 5개 보병대대 7,420명을 보내왔다.

이 규모는 유엔참전국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며 112명이 전사하고 57명이 실종됐으며 299명이 부상을 입으며 우리를 형제처럼 도왔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라모스 전 대통령이 한국전에 소대장으로 참전했고, 현 아키노 대통령의 아버지인 나노이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마닐라타임스 기자로 종군한 등의 인연으로 지금도 어느 우방보다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이 1만5,000명으로, 필리핀에서는 우리를 사위나라로 부르고 있다. 그런 필리핀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지원과 관심은 인색해도 너무 인색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세계10위 경제대국으로 부상,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위상이 높아졌다. 지난 70년대 필리핀이 우리나라에 장충체육관을 지어줬듯이 우리도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빈민구제와 산업인프라를 지원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도움을 받던 나라의 이미지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세계 각국은 지구촌에서 발생하는 어떤 자연재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야 하는 운명공동체가 됐다. 우리가 필리핀에 너무 적은 지원금을 주는 것 아니냐는 여론의 비판에 대해 정부는 긴급구호예산의 한계에 비춰 최대한 한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쥐꼬리 같은 예산편성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격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총장 자격으로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 일성이 우리의 공적개발원조가 너무 야박하다는 지적이었다. 현재 국내총생산액 대비 공적개발원조 비율은 0.1%를 밑돌고 있다. 반 총장은 이를 최소한 0.7%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격에 맞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이나 미국이 재난발생과 동시에 재난구호 및 의료인력을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안전대책과 장비, 보험 등을 평소에 착실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준비가 전혀 없어 재난 지역의 안전이 확보된 뒤에나 인력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약탈과 방화, 총격전까지 벌어지고 있는 태풍피해 현지에 우리 구호인력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반 총장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도덕적으로 특별한 임무를 갖고 있다”고 했던 지적을 깊이 생각할 때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의 경제성장과 한류열풍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신기루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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