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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UN사무총장 선조 반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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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길 예(禮)학자·서예가
  • 승인 2014.08.0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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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길 예(禮)학자·서예가

반석평(潘碩枰: 1472-1540) 光山人.(옥구 産)字는 公文이요, 號는 松崖(송애)라 하니 서린(瑞麟)의 차자(次子)이다. 청백염겸(淸白廉儉: 청렴하고 결백하고 검소함)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졸(卒: 죽음)하니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공부하고 싶은 노비의 열망이 높은 신분의 장벽마저 뛰어 넘었다. 참판집안의 종에서 형조판서로 우뚝 선, 개천에서 용이 된 이물이다. 그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직계조상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서얼(庶孼)’이라 불렀다. 그러나 ‘서’와 ‘얼’에는 구별이 있다. 얼자는 양반과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을 일컫는 표현이다. 17세기의 족보 ‘씨족원류’와 19세기의 ‘만가보’에 의하면 석평은 충북 음성군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반석평의 산소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의 공식 지명(地名)은 ‘행치재’이다. 반석평의 후손들은 과거부터 내려온 지명에서 이름을 따 자신들을 ‘장절공 행치파’라고 불러왔다. 장절공은 반석평의 시호(諡號)로, 반기문 UN사무총장은 그의 직손이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 반서린을 잃는다. 그러자 어머니 회미 장 씨는 반석평 등 3형제를 데리고 한양으로 가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한 것으로 문중 사는 전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다소 혼선이 일어난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는 노비의 신분으로 한양의 이 참판(?)집에서 가노(家奴)노릇을 했다. 본래 영리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의 순민(醇敏: 순수하고 민첩함)한 성격을 좋아하여 詩書(시서)를 가르치고 자식과 함께 배우게 했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해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어,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친척양반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다. 아마 반석평이란 이름으로 과거를 보았으니 반(潘)씨 문중으로 출계시킨 것 같다. 이 참판은 성씨의 뿌리까지 배려한 것 같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정9품)이 되었다. 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 되어 여진의 동경을 보고 했으나 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그의 출신성분에 대한 시비는 중종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이다.

“홍문관은 그 인물을 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문지(門地: 문벌)도 보아야합니다. 반석평은 문지가 미천하기 때문에 이미 서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서경은 지금으로 치면 인사와 관련된 서명을 의미한다. 이 같은 폐단을 딛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토록 건의한 인물이 안당(安塘: 1461~1521)이었다. “판서 안당이 계청하기를 ‘반석평의 직급은 비록 준직(準職 (制) 堂下官으로서 가장 높은 堂下 正三品의 벼슬)에는 미달하나, 재주가 문무를 겸했으니 탁용하여 시험해 볼 만합니다. 하니, 上(임금)이 따랐다.” 1516년 문신 안당의 추천으로 경흥부사가 되었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31년에는 성절사(聖節使: 임금의 생일을 축하하려가는 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正二品 지금의 법무부장관)를 지냈다. 그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시대 때 조선 팔도 감사(觀察使)를 모두 역임한 인물이 단 2명이 존재한다. 바로 함부림((1360~1410), 그리고 반석평이다. 석평이 형조판서 일 때 길에서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거지꼴이 되어 다니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벼슬을 깍아 이오성에게 주기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용서하고, 이오성에게 사옹원(司饔院: 조선 때 임금에게 음식을 올리는 관청) 별재(別製: 특별이 만들 음)벼슬을 내리고 석평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 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석평과 조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德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물론 석평의 출세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참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워 양인이 되게 해주었고 석평이 노력해 정식으로 문과급제 했기 때문이다. 중종실록에는 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그가 종 출신이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든 것이 인상적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품이 민첩하고 순수하고 인자하고 성실한 것은 이 선조(先祖)의 유전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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