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희 울산대학교 교수·건축학부

필자는 선하게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는 선형적 세계관과 물리적 시공은 균질하고 평평하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객관적 과학 패러다임 하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세대이다. 20대 말 다시금 현대과학과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동안 교육받은 세상지식과 복잡무쌍한 ‘진짜 세상살이’와는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 중 가장 큰 깨달음은 실제 시공간은 질적으로 객관적이거나 균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시공간은 ‘질적으로 상대적으로 비균질하다’. 더불어 모든 순간을 진지하게 ‘열심히’만 보낸다는 것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약간의 배신감과 혼란으로 두 번째 사춘기를 보냈던 필자가 삶에 있어 여러 차원으로 ‘리듬’과 ‘밀도’를 고민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다. 산다는 것의 매력과 함께.  

사실 생각해 보면 이 비밀은 필자가 어린시절 식음을 전폐하고 집 앞 골목길에서 ‘놀던’ 때에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기도 했다. 동네 친구들과 비석치기나 숨바꼭질을 하다보면 긴 해가 어느덧 쏜살같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책상 앞에 숙제를 할라치면 왜 그리 시간은 영겁인지, 방을 들락날락하는 걸 보다 못해, 어머니가 필자를 책상의자에 묶어놓았던 적도 있었다. 공부를 공부로 하면 그렇게 지루했던 것도, 스스로 아빠의 서재에서 찾아낸 세로정렬의 ‘삼국지’ 같은 전집을 며칠 만에 후딱 읽어 치운 것을 보면 필자에게 그것은 하나의 ‘놀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수학문제도 친구와 게임하듯이 풀면, 하기 싫은 집안일도 언니와 소꿉놀이처럼 하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놀이’, 그리고 ‘놀이성’은 필자에게 어떠한 일에 신나게 ‘몰입’할 수 있는 마음의 ‘전이도구’ 같은 것이었고 어린시절 주변 어디나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몰입 속에서 행해진 일과 공부의 결과는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 좋았고, 공부를 위한 공부들은 다 잊혀진 반면,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지식들은 몸와 마음에 새겨져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자라면서 촘촘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곧 성공이라는 사회의 관념에 편입되면서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놀이’라는 것은 일상과 공부로부터 떨어져 나가, 일상과 공부는 지겹고 진지한 것이고, 놀이는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하는, 생산적인 개념의 반대개념으로, ‘단지 수단으로서의 놀이’로 전락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어느덧 필자도 뛰지 않고, 깔깔대지 않고, 엉엉 울지 않는 ‘어른’이 됐다.  

역사적으로도 인식론이 지배적인 세상에서 ‘놀이’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보다 의미 없다고 천대를 받아왔지만, 어느덧 놀이는 창의적인 시대로 여겨지는 21세기의 패러다임이 돼 있는 듯하다. 역사 문화학자였던 요한 하우징아는, 저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을 통해 놀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며 문명을 창조하는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 바 있다. 놀이는 인간의 의식과 정치, 경제, 문화, 전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것이 문명 발달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21세기 창조적인 기업들이 ‘놀이성’을 기업의 운영방식에 적용하고 업무공간에 일과 놀이가 뒤섞인 환경을 도입함으로써 직원들로 하여금 경직된 사고를 풀고 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소통 속에서 업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례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일상은, 학교는, 마을은, 도시는 어떠한가? 일과 공부를 보다 즐겁고 창의적이게 몸과 머리와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일상에서 놀이가 불쑥 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까?
 
최근에 부모와 어린이, 청소년의 놀이에 대한 생각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매우 작은 조사였다. 부모는 자녀의 ‘놀이’가 자녀들의 ‘사회성’, ‘튼튼한 몸’, ‘창의적인 생각’을 키우는 의미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놀이란 ‘스트레스로부터의 휴식’이라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뛰어놀던 아이들이 고학년을 거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위해 급속히 실내 공간에 갇히게 되는 것도, 직접 몸을 놀려 놀기 보다는 TV속 예능프로그램을 지켜보거나 오프라인 공간에서 혼자 컴퓨터 가상 공간 속의 게임이라는 단순한 ‘놀이’에 본격적으로 함몰하게 되는 것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공부와 놀이, 생산과 놀이를 양분하는 우리의 목적지향적이고 경직된 삶의 체계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한다.   

놀이문화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에 따르면 요즈음에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어도 자신들도 어떻게 놀지 모르니 놀이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어른들도 잘 놀아야 아이들도 잘 놀 수 있다. 당분간 우리에게 있어 놀이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 이러한 ‘경직’을 풀기 위해 다시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놀이의 형태로 발생했고, 문화는 아주 태초부터 놀이됐다. 생활의 필수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들, 가령 사냥도 원시사회에서는 놀이형태를 취했다. 사회생활에는 생물학적 형태를 벗어나는 놀이 형태가 스며들어가 있었고, 이것이 사회의 가치를 높였다. 사회는 놀이하기를 통해 생활과 세상을 해석했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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