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에서 독립운동 하던 남도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신불산에 거점
왕방∼배내골 ‘681갈산고지’ 마련
주요임무는 후방 교란해 부산 함락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인 신불산이 거대한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흘린 피로 물든 ‘피못’, 구한말 분개한 항일의병들이 결사항쟁한 흔적들, 그리고 한국전쟁이 남긴 숫한 상흔들이 산산골골에 녹아있다.
목숨을 건 싸움은 1948년에서 1953년까지 7년 동안 영남알프스의 높은 산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펼쳐졌다. 신불산 빨치산은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한 특수 게릴라부대였다. 영남알프스의 산들은 울산, 경주, 청도, 밀양, 양산 지역으로 반경 250km까지 이어져 산악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신불산 빨치산 사령관은 남도부(본명 하준수)였다. 일본 중앙대학 재학 중 조선학도병 징집을 거부, 지리산에 입산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산악전에 뛰어난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9월 신불산에 거점을 마련한다. 왕방골과 배내골 사이 우뚝 솟은 옥봉이 그들의 거점인 ‘681갈산고지’이다. 사방 10리를 한 눈에 관찰할 수 있고,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배내봉 등 태산준봉에 에워싸고 있어 적에게 노출 되지 않았다.
남도부부대가 이북 회령을 출발할 당시 유격요원은 300명 정도였으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신불산에 도착할 무렵엔 150명 정도로 줄어든다. 나중에 합류한 인민군 후퇴병력까지 합쳐져 약 1,000명까지 이르다가 3년 후인 소멸 시기(1953년 7월 휴전협정)에 접어들어서는 최후의 10여 명만이 남게 된다. 신불산 빨치산의 주요임무는 후방을 교란해 부산을 함락하는 것이었다. 남도부가 직접 지휘하는 공격에는 하루에 산악 백리를 간다는 부대원 60~70명이 동원되었다. 남도부는 전향한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돼 1955년 8월 서울 외곽 수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을 당했다. 시신을 수거하지 못한 유가족들은 함양 생가 뒷산에 시신 없는 목묘(木墓)를 썼다. 금강골에는 일명 ‘남도부짚차’로 불리는 바위가 아리랑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 이 기고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