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근 시인

단골로 가는 식당, 점심시간이다. 문전성시는 아니라도 제법 손님이 분비는 식당이었는데 요즘 부쩍 손님이 줄었다. 하긴 요즘 이 곳만은 아닐 터이다. 어느 때와 같이 식당 한구석에서는 텔레비전에서 어느 방송사인지 토론프로그램에 참여한 패널(panel)의 말싸움이 한참 진행 중이다. 대수롭지 않게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저 쪽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먹던 숟갈을 텔레비전을 향해 던지는 사람이 있다. 모두 깜작 놀라 텔레비전과 40대 중반 쯤 되는 손님을 번갈아 본다. 

언젠가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방송사들이 시청률 우위를 위해 ‘단독입수’한 사건을 이슈로 저마다 해박한 지식과 통찰(洞察)로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인다. 진행자는 사람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더 신랄해야 한다고 패널들을 부추긴다. 그런 프로가 처음에는, 아니 지금도 호기심을 후련하게 풀어주기도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식상하기 시작했다.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얘기가 다 사실일지라도, 사람들은 그들이 다루는 현실에서는 미래를 짐작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비리 투성이이고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라의 미래를 맡길 사람이 없단다. 사람들은 미래가 희박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더 짜증나는 것은 그들 중에는 자신이 선호하는 어떤 특정인을 심하게 편애하면서, 반대편의 사람을 고도로 훈련된 ‘욕의 기술’로 인격을 모독하는 모순으로 토론의 룰을 망각하는 패널도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다수의 방송사가 늘 저런 프로이고 특별할 것도 없이 비일비재 하거늘, 그 손님은 그런 프로를 처음 시청하는 건지, 아니면 단골로 그런 프로를 시청하다 오늘은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무튼 식당 안에 손님들은 TV에 시선을 고정하게 됐다. 

그리고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 저런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는가? 그들의 직업은 변호사, 교수, 또 해당 언론사 기자와 논설위원들, 무슨무슨 평론가, 심지어는 의사도 있다. 그리고 무슨 연구소가 그리도 많은지 대부분은 외국에 한 번씩 나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훌륭한 소장님들이다. 물론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토론에 임할 수는 있으나, 원래 전공인 분야에 존경받는 직능인으로서 재능봉사 할 곳도 많을 터인데, 아무튼 그들은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있는 사람의 비리와 잘못된 과거를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가, 그래서 그 비밀스러운 것을 신랄하게 공개하는 경쟁을 하면서 포퓰리즘에 의한 자신의 존재를 홍보한다. 

어떤 분야든 목적 달성을 위해 동업이라는 끈끈한 관계로 마음과 힘을 합치면서도, 오늘 원수가 될 것을 어찌 미리알고 중요한 대화를 녹음하기까지 했단 말인가. 직장에서도, 회식자리에서도, 사랑을 나누는 밀회 장소에서도 모두 어떤 관계인지 녹취를 할 수밖에 없었나? 놀랍다. 그리고 무섭다. 세상에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지금 더 놀라운 것은 그 녹취물이 어떻게 방송 토론프로 패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수집 공고를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또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혹 돈으로 유능한 정보원을 고용하고 있는 것일까? 또 그들이 ‘녹취’라는 증거물을 수집하는 수단과 방법에는 문제가 없는가. 이 나라가 어찌 ‘녹취만능’의 범죄가 범람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만 본다면 수요는 언론가와 패널들이며 공급은 인간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언론사 기자라면 정보수집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정보수집 전문인들이니까. 

백성들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만 믿는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순수해서다. 그리고 스스로 언로(言路)를 만들어 열어놓고 사회의 현상과 변화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교환하고 전달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협동하며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언로로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중심의 사회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백성들의 언로가 궂은비로 질척거리거나, 폭풍으로 끊기지 않아야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분노하면 자신들의 언로를 변경한다. 

코미디 프로는 한바탕 웃고 나서 잊어버려도 괜찮은 단순한 프로라서 좋지만, 토론 프로는 언젠가부터 남의 사생활을 몰래 엿보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계층간의 갈등을 간접체험하게 되고, 막말과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래서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급증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상대와는 동거(同居)를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언론은 신성해야 한다. 언론은 정서적이어야 한다. 백성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의지해야 한다. 종교에 속해 신앙을 가지는 행위만으로 그런 불안한 요소들이 해결되는 시대가 아니다. 언론을 형성하는 언론매체를 백성은 믿는다.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언론사(言論社)는 고결하지 않아도 된다. 해박한 지식으로 말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공정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패널을 추천해서 백성들의 언로에 서게 하자. 슈람(Schramm,W.)의 언론의 목적과 네가지 기능에 입각해 진정한 언론인이 출연하는 토론 프로가 되자. ‘패널 高試(고시)’를 신설해서 채용하는 것은 어떤가. 백성들은 언론을 알아야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듣지 않아도 될 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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