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파견 사신 머리 안 숙여 죽도록 맞고
‘정묘호란’땐 수많은 동포 잡혀갔는데도
명나라만 맹신하다 끝내 병자호란 불러

이승만 명령으로 땅에 묻은 ‘삼전도’비석
어느해 물난리 때 유령처럼 다시 나타나
부끄러운 역사 억지로 감춰봤자 되풀이

 

김병길 주필,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외 변방은 모두 오랑캐’라는 화이(華夷) 사상을 신봉한 나라. 조선은 명(明)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개국했다. 숭명사대를 자가발전하며 확신은 맹신이 되고 맹신은 광신이 됐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 부자관계로까지 바뀌며 아양을 떨듯 명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16세기 말, 전국시대를 마무리한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조선에게 명나라 정벌 길을 트라고 강박했다.

‘숭명사대’의 갑옷을 과신한 조선은 단호히 거절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개전 초기부터 조선은 풍비박산을 면치 못했다.

국왕 선조는 자신만 살겠다고 국경의 끝까지 도망가 망명을 시도했으나 명나라의 거부로 실패한다. 관망하던 명은 국경 가까이까지 일본군이 진격하자 마지못해 원군을 파병한다. 

조선 땅을 밟은 명군은 왜군과 다르지 않았다. 우방의 만행은 엽기적이었다. 지방 수령의 목을 묶어 개처럼 끌고 다니다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개패듯이 패죽였다. 민간인에 대한 약탈과 강간은 일상사였다. 명을 아버지로 생각했지만, 명은 자식이 아니라 구걸하는 거지로 대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한다. 왕과 신료들은 명이 나라를 구해준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입었다고 감격했다. 선조는 죽을 때까지 명나라 천자가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방패막이를 자청해 피바다가 된 조선의 모습을 감안하면 은혜를 입은 쪽은 명나라였음에도 그랬다.

16세기말 누루하치가 이끄는 후금(1636년 이후 청나라)이 만주에서 무섭게 일어났다. 백전백승의 전투력과 외교력은 물론 경영마인드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왜란으로 명나라 통치의 공백이 생긴 만주 지역은 누루하치 세상이 됐다. 그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지원을 제의했으나 선조는 오랑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조선이 후금과 연합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여운은 남는다.

1621년 3월 이후, 후금은 요동을 완전 장악했다. 조선은 명나라 통행길이 차단되자 섬이 됐다. 광해군은 외교를 통해 후금과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신료들은 전쟁은 필연이며, 승리 또한 필연이라 생각했다. 신료들의 후금에 대한 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국정은 마비되고, 왕권은 실종됐다. 그 틈을 타 권력에서 멀어진 서인들의 쿠테타로 인조의 시대가 열린다. 

명나라는 조선이라는 오랑캐를 이용해 후금이라는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이이제이’ 전략을 짰다. 1626년, 누루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후금의 정권을 장악한다. 군사력이 약한 조선과의 전쟁은 군사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명을 치기에 앞서 조선을 확실하게 단속할 필요도 있었다.

1627년 1월 13일,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고, 저항도 미약했다. 인조는 경호병력만 이끌고 강화도로 도망갔다. 조선군은 스스로 자조하듯 ‘싸우는 데는 능하지 못했으나 달아나는 데는 능했다’. 3월 3일, 조선은 항복한다. 후금이 형, 조선이 아우가 됐다.

이른바 ‘정묘호란’은 ‘병자호란’의 예고편이었다. 인조는 종사를 구하기 위해 오랑캐와 화친하지만, 명과의 단절 요구는 강하게 거부했다. 수많은 동포들은 후금의 노예로 잡혀갔다. 패전에 대한 자성은 잠시 뿐, 숭명배금론은 사이비종교처럼 조정을 지배했다. 

후금은 나날이 강해졌다. 대륙의 무게 중심은 후금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635년에는 ‘차하르몽골’이 투항하면서 홍타이지에게 원나라 옥쇄를 바쳤다.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대청 제국 황제가 됐다. 조선 사신은 그런데도 머리 숙이기를 거부해 무자비하게 얻어맞았다. 그래도 버텼다. 대단한 꼿꼿 사신이었다.

인조의 머릿속에는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도망갈 생각 뿐이었다. 현실주의자 최명길은 인조에게 전쟁을 피할 계책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직접 나가 싸울 계책을 세우든지 선택하라고 촉구했다. 

운명의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너 화살처럼 내려오자 조선군은 산성으로 숨었다. 강화도를 도망갈 골든타임을 놓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1637년 1월 1일 설날 아침, 인조와 신하들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명의 천자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절을 올렸다. 

남한산성에는 성을 탈출할 원심력도, 성을 단결시킬 구심력도 없었다. 1월 27일,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국서를 전달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500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렸다.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47일간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이 32년만의 최장연휴 추석대목을 수놓았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이 어떻게 38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반쪽 대한민국의 처지와 이렇게 닮았을까.

삼전도 수항단에서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예를 올리면서 병자호란은 막을 내리는 것으로 영화 ‘남한산성’은 끝난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병자호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과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 김상헌은 똑같이 청나라로부터 전범(戰犯)으로 몰리는 시달림을 겪게 된다. 

무조건 항복한지 4년째가 된 1641년, 전범이라는 죄인으로 청나라 도성 심양 땅으로 잡혀간 김상헌은 역시 전범으로 잡혀와 있던 최명길과 옥중에서 만나게 된다. 그렇게도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던 두 사람은 비로소 시(詩)를 지어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이 7년 만에 서로가 품었던 오해를 풀어내는 순간이다.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강남 땅 석촌호수가에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다. 380년 전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치욕의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오랑캐의 수괴를 황제라 부르고, 그의 은혜를 입어 조선종사가 유지되며 따라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었다’는 비문은 조정의 판단 잘못으로 당한 피눈물을 쏟아야 할 수모였다.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 건너에 치욕의 ‘삼전도비’가 서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당장 뽑아서 치워 버리라고 명하였다. 관리들은 서둘러 삼전도비를 뽑아 땅속에 묻었다. 그 후 치욕의 역사도 묻히고 잊혀지는 듯 했으나 어느 해 여름장마 물난리를 겪으면서 묻혀 있던 삼전도비가 유령처럼 다시 땅위에 나타났다.

아무리 숨기고 싶은 치욕의 역사라도 묻히거나 감춰지지 않는다. 부끄러운 역사를 애써 감추거나 숨기려 하면, 감추려고 했던 그 부끄러운 역사는 다시 되풀이 된다는 명언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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