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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에세이 칼럼] 1987년 중앙일보 시절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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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길 주필
  • 승인 2018.01.17 22:30
  • 댓글 0

‘박종철 화장’ 거부한 최환 공안검사
영화 ‘1987년’서 영웅으로 부상
중앙일보 특종 보도 없인 불가능

당시 편집국 긴급상황 기억 생생
엄혹했던 군부정권 ‘보도지침시대’
‘기자 사명 다했느냐’면 부끄러울 뿐

 

김병길 주필

영상의 폭발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영화 ‘1987년’에서 영웅으로 부활한 최검사(최 환) 때문이다. 빛바랜 필름처럼 내 기억의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1987년. 영화에서 갑자기 그 때가 오늘 이시각 현실처럼 엄습해 왔다. 스크린 앞에서 40대 초반 중앙일보 기자 시절, 나를 되돌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취재현장서 좌충우돌 하다 편집부 기자로 내근을 하면서 1987년을 맞았다. 매일 퇴근 후  최루가스로 눈과 코가 따가왔던 거리에서 민주화 현장을 실감했다.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7면에 실린 기사의 세로 2단 제목은 이랬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이 기사를 쓴 중앙일보 사회부 법조출입 신성호 기자(당시 31세)는 1월 15일 아침 서울 서소문동 검찰청사에 들어섰다. 검찰청사 이곳저곳을 취재하던 신기자는 9시 50분, 엘리베이터 10층 버튼을 눌렀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공안4과 과장과 차나 한잔할 요량이었다. 


“경찰들 큰일 났어.” 소파에 앉자마자 이과장이 말을 꺼냈다. 신기자는 ‘무엇이 큰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민한 기자의 후각이 발동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용을 물어봤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직감에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 너무 기세 등등했어요.”(신기자)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공안4과장) 대화는 이어졌고, 그의 말을 토대로 순간 이런 기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남영동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사망했다.’ 남영동이라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있는 곳이다. 급히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와 검찰 구내 전화기를 들었다. “부장,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이두석 사회부장은 신기자와 치안본부, 서울대 출입 기자에게 추가 취재를 지시했다. 신기자는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직전 대한변호사회 회장 역임)에게 달려갔다. “조사 받던 대학생이 왜 갑자기 죽었습니까, 고문 아닙니까.” 이 부장 검사는 당황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단언할 수는 없어. 쇼크사라고 보고 했으니 조사를 더 해봐야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중앙일보 편집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추가 취재를 통해 사망자의 이름과 학과를 확인했다. 낮 12시. 당시 석간이던 중앙일보 첫판(거리판매신문) 인쇄는 이미 시작됐다. 금창태 편집국장 대리가 윤전기를 세우고,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세로 2단 기사를 사회면에 밀어 넣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역사적 특종 보도 되는 순간이었다.


신문이 점심시간 서울시내 거리에 뿌려지자 곳곳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 국장대리에게 전화해 “기사를 당장 빼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오후 6시 경찰은 마지 못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박종철 군이 ‘억’하고 죽었습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말도 안되는 해명에 언론은 분노에 휩싸였고, 결국 그 해 민주화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신성호 기자는 2012년 7월 수석 논설위원 시절 박사학위 논문 ‘박종철 탐사 보도와 한국의 민주화 정책 변화’에서 그동안 취재원 보호를 위해 공개하지 않았던 당시 이홍규 대검 공안4과장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는 87~89년 대검찰청 공안4과장을 맡았고 1995년 은퇴 후 한 때 법무사로 일했다.


이홍규 과장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이 사망한 다음날인 15일 아침,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알았으며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이렇게 묻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평소 신뢰관계에 있던 신성호 기자가 왔길래 내용을 알려주게 됐다는 것이다. 


신문에 보도된 뒤 검찰청이 쑥대밭이 됐다. 제보자 색출 작전도 벌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넘어갔다. 


압력에 굴하지 않고 박종철군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부검토록 한 최검사. 그는 혈기왕성한 공안통 검사로 당시 수많은 수배 학생을 검거했다. 하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었기에 ‘박종철 시신 화장’은 거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1987년’에선 영웅이 필요했다. 영광스럽게도 ‘최검사’가 선택되었으며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단연 주연급으로 예상밖이었다. 


발화 후 꺼질듯 말듯 이어가던 민주화 바람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와 연세대생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이 불에 기름을 붓듯 가열되면서 폭발했다. 영화에서 최검사의 역할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은 남영동 치안 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박종철은 1985년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다. 여름방학때는 위장취업도 했다. 86년 4월 ‘청계 피복 노조 합법성 쟁취를 위한 대회’에 참가해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또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과거 전력 때문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7월 15일 출소했다. 이때는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다. 고문치사 이후 알려진 박종철의 전력이었다.


엄혹했던 박정희·전두환 군부 정권 시절 일선 기자로 살면서 부딪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1987년, 어느 사이 14년차 중견 기자로서 사명을 다했느냐고 물으면 부끄러울 뿐이다. ‘보도 지침’이 얽매어 쓰고 싶은 기사를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던 당시 언론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일선 취재 현장을 기피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내근 편집부에서 다소 맛이간 식재료(취재기사)라고 하더라도 ‘주방에 앉아 최고의 요리솜씨를 발휘해 매일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는 요리사’가 더 매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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