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때마다 괴롭힌 엉뚱한 지역 색깔
여덟번 낙선 이후 도전 이유 물으니
웃으면서 ‘나는 정치 탐험가’라고 대답

1987년 이후 공업탑로터리 지킨 변호사
절치부심 반생을 도전한 ‘울산탐험’
이제 살림꾼·목민관으로 새로운 출발

 

김병길 주필

노르웨이의 극지 탐험가 아문센이 비행선 ‘노르게'호로 북극 횡단에 성공한 것은 1926년이었다. 하지만 1개월 후 조난 당한 다음 지금까지 행방불명이 해명되지 않고 있다.

역사상 어떤 인물보다 미지의 세계를 많이 탐험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데이빗 리빙스턴 박사였다. 1840년 27세의 리빙스턴은 문명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땅, 아프리카로 떠났다. 정글과 사나운 동물과 질병이 기다리는 어둠의 대륙을 탐험하면서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를 런던에 있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보냈다.

1856년 영국에 돌아온 그는 자신이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후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나 다시 탐험의 땅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1866년 왕립지리학회의 의뢰에 따라 잔지바르에서부터 나일강 원류(源流)를 찾는 탐험에 나서 강의 원류를 발견했으며 1873년 세상을 떠났다. 미이라로 만들어진 그의 유해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더불어민주당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인은 6·13 지방선거에서 8전(顚) 9기(起) 끝에 꿈을 이루었다. 당선되기까지 1992년부터 26년동안 국회의원 선거 여섯 번, 1998년, 2002년 시장 출마 두 번, 여덟 번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울산은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시장 선거에서는 민자당-신한국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 보수 진영에서 모두 이겼다.

여덟 번 낙선한 뒤 한참 시간이 흐른 어느날 그를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험난한 도전의 이유를 물으니 웃으면서 한 말이  ‘나는 정치 탐험가’라는 것이었다. 그를 험난한 탐험길에 나서게 한 것은 그와 함께 ‘영남 인권 변호사 3인방’으로 불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현 대통령의 격려가 컸다. 다섯번째 떨어졌을 때 정치를 그만둘 생각을 했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내가 대통령에 나가니 함께하자’고 해서 다시 정치를 시작했다. 
변호사 송철호는 그 숱한 낙선의 고배 끝에 한 번도 제대로 ‘왜 떨어졌는지’ 복기를 해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낙선 끝 몰려드는 선거 뒷치닥거리에다 현업인 변호사 일로 하루 빨리 복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1985년 부산에서 개업한 변호사 송철호는 운명처럼 1987년 울산으로 둥지를 옮겼다. 이후 공업탑 로터리에는 ‘변호사 송철호’ 간판이 떠나질 않았다. 2005년 4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국민고충처리위원장으로 서울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그는 울산 공업탑 로터리 지킴이였다.
부산 변호사 시절 노무현·문재인 변호사와 호형호제 할 때만 해도 시국 사건 의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울산으로 둥지를 옮긴 1987년 울산은 ‘87 노동자 대투쟁’ 진원지가 되어 연일 노사 분규로 날을 세웠다.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된 그의 노동자·인권 변론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술이라면 술, 노래라면 노래, 청탁을 가리지 않았던 호방한 그의 인간적 면모는 지역사회에서 많은 이들과 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 송철호의 ‘울산 탐험’은 1977년 성안동 함월산 백양사에서 사법시험 공부 보따리를 풀면서부터 시작됐다. 백양사를 품은 명산 함월산은 그를 매료시켰다. 그때만 해도 15년 후 함월산이 내려다 보고 있는 울산 중구에서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될지는 꿈에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1992년 출마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지만 김대중·이기택 민주당 공동대표의 총선 출마 권유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40대 초반의 송철호는 결국 민정당 사무총장이던 고 김태호 후보와 힘겨운 승부를 벌여야 했다. 유세장에서는 ‘송철호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선거 때마다 그에게는 지역색깔이 지워지지 않았다.
7·30 보궐 선거 때도 지역주의는 여지 없었다. TV 방송토론 마무리 연설에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선거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 가족들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북받친 눈물이었다고 했다.
그의 태생지는 1949년 부산 보수동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어머니를 여의고 전북 익산 할머니 댁으로 가서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김대중 정권 때 법무장관을 지낸 둘째형 송정호의 이력서에서 드러난 ‘전북 익산 출신’이라는 기록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때 그는 “만주에서 태어난 형이 왜 익산에서 태어났다고 해 내 선거를 힘들게 하느냐”고 형에게 푸념했다.
6·13 지방선거는 ‘올드보이 민주주의’의 폐막을 알리는 장엄한 예포이다. 보수-진보간 정권교체를 말하기도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 새 시대가 열렸다.
절치부심, 반생을 도전해온 인간 송철호의 정치 탐험-울산 탐험은 6·13의 또다른 감동이자 새로운 대답이기도 하다. 
밀림에 큰불이 나자 모든 동물이 달아나는데 벌새 한 마리가 물을 머금고 바쁘게 오갔다. 코끼리가 왜 달아나지 않느냐면서, ‘그 정도 물로 불을 끌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벌새의 대답이었다. 낚시꾼은 낚싯대에 무엇이 걸릴지 모른다. 이제 정치 탐험가는 고난의 발걸음을 돌려 시민들의 삶을 챙기는 ‘살림꾼’이자 목민관(牧民官)으로 새출발해야 한다. 결코 공약의 노예에 그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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