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태 울산학연구센터장.  
 

지난 주말 대한 불교학의 본산 동국대학교에서 여운이 큰 종이 울렸다.

그 울림은 ‘인간의 고통을 이용하는 거대한 농간을 멈추라’는 것이었고 ‘무지와 기만의 성채를 허물라’는 소리였다. 나아가 ‘종교의 이름으로 화려하게 배열한 허위의 옷을 걷으라’는 외침이었다.

나는 그렇게 들었다. 그 울림을 울산에도 전하고 싶다.

2019년 3월16일 서울 남산 자락 동국대학교 만해관에서 불교의 누더기를 새로 깁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놀라운 주장이었다. 붓다 입멸 2500여년만이요 원효 입멸 1400여년 만이었다. 새로 깁자는 주장은 다른 말로 불교개혁이다.

이날 행사는 울산대 원효학토대연구소와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연 ‘원효학’에 관한 학술대회였다. 강연의 주된 발표자는 울산에서 30년간 원효를 탐구한 울산대 철학과 박태원 교수였다. 원효학토대연구소 김준호.강찬국 연구교수도 뒤이어 발표했다.

여기서 내가 보고 들은 얘기는 이랬다.

붓다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덕누덕 기워온 가르침과 배움이 있었다. 그로부터 1천여 년 만에 동국에서 태어난 원효가 이 누더기를 찢어버리고 산뜻한 새 옷을 여민 적이 있었다. 그 옷의 등록상표는 일미(一味). 일심(一心). 일각(一覺). 일여(一如)처럼 온통 ‘하나’였다. 성스러움과 세속도 하나인 ‘성속불이(聖俗不二)’였다.

그로부터 다시 1천3백년이 흐른 지금 원효가 지었던 옷도 자르고 기워져 누더기가 되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해인사 8만대장경을 떠올렸다. 얼마나 길(經)이 많길래 8만 가닥이나 되나! 8만경 가운데는 원효가 가르친 길도 새겨져 있다니 어느 길로 가야할지 헷갈릴 수 있겠다는 상념이었다.

이 상념을 깨운 박 교수의 시선이 놀라웠다.

그는 지금 불교의 특정 가르침에 대해 ‘기만의 성채’ 또는 ‘가식의 전당’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여기는 동국대학교다. 대한불교의 산실이요 보육장 아닌가. 반발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해관을 채운 승려와 학인들은 묵묵히 들었다.

의아스러웠다. 공감하는지, 아니면 참는지 알 수 없었다.

박 교수가 불교비판과 함께 제시한 새 옷, 즉 인간 삶을 감싸줄 새 옷의 상표는 ‘파도타기’였다.

그는 파도타기의 영어명 ‘서핑’(Surfing)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저 바다의 서퍼들처럼 바다에 빠지지 말고 서핑을 즐겨라”고 했다. ‘해인삼매’며 ‘월인천강’ 같은 고답한 언어에 길들여진 귀가 번쩍 띄는 언어였다. 원효가 신라 거리에서 ‘하늘을 떠받칠 도끼자루’를 찾은 행각과 같다고 생각했다.

파도타기의 요지는 알아듣기 쉬웠다.

‘파도와 같은 세계, 즉 세파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누릴 안락은 몸과 정신을 부지런히 움직여 가라앉지 않고 노는 유희’라고 비유했다.

파도타기의 전제는 단호했다. 오랜 세월 ‘불변의 궁극실재’를 찾는다며 선정수행. 명상. 요가를 했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인간의 모든 세계경험은 언어와 개념에 기반을 두므로 그것을 벗어난 것을 찾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철저한 경험주의자인 붓다는 보고 느끼는 감관기관에 의한 검증가능성을 원칙으로 삼았고, 원효 역시 그 점을 각성시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됐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새 옷을 지어야 하고 파도타기를 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런 설명만이 만해관 강론의 전부가 아니었다. 한국불교사연구소 전준모 연구원이 전통불교의 맥락을 대변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박 교수가 강론한 논문 ‘원효의 일심과 깨달음의 의미’와 강한 대조를 보였다.

박 교수의 논문과 이날 강론이 널리 전파될 때 그 여파는 헤아리기 어렵다고 본다.

원효학토대연구소는 울산대학에 있고 원효가 저술 내용을 검토하려고 오갔던 문수산 자락에 있다. 또 원효와 연고 깊은 천성산 운흥사와 대곡천 반고사가 지척이다. 원효의 숨결이 미치는 이 연구소가 일파(一波)를 만파(萬波)로 만들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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