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유세?시위로 얼룩진 정치적 공간
 월드컵 때 축제의 장으로 새롭게 부각
 세월호·촛불로 증오의 함성 높아져

 
 날선 정치, 노조구호 안 들리는 곳
 평화와 시민 위한 휴식공간 거듭나
‘도심의 숨통’이라는 기능에 충실해야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 시대를 맞아 오는 2021년까지 새롭게 단장되는 태화강역 광장. 울산매일 포토뱅크
김병길 주필

‘뒷자리’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신호는 몇 가지 이론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리학자 제이 애플턴의 ‘조망과 은신처’ 이론이 그 중 하나다. 인간은 뒤쪽을 보호하고 넓게 트인 정면을 조망하기를 원한다. 데이비드 버스가 쓴 ‘진화 심리학’ 역시 “숨을 곳이 없이 탁 트인 곳은 마음을 끌지 못한다”고 했다.

광장을 설계할 때도 이와 같은 배려가 필수적이다. 맨 뒷자리 같은 곳, 광장의 가장자리는 도시의 매력이 펼쳐지는 중요한 장소다. 건물로 막혀 있어 뒤쪽을 보호하고 넓은 공간을 조망할 수 있어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좋은 광장을 꼽아보라면 빠지지 않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캄포 광장의 건물 주변, 가장자리에는 사람들이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이 수두룩하다. 물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여러 건축적 장치, 상업용 공간과의 적극적인 연결 등 세심한 고려가 없다면 광장을 그저 지나치고 마는 곳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공 광장은 상점, 가판대, 벤치, 진열대 등과 같이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엑티비티 포켓’(부분적으로 둘러쌓인 작은 활동 공간)이 필요하다.

나의 뇌리에 가장 먼저 인식된 광장은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이었다. 이때 광장은 공간보다 관념적으로 인식됐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의 나라를 선택한 전쟁포로 이명준은 뱃머리에서 넘실거리는 거대한 파도를 마주하고, 자신의 광장으로 투신한다. 그에게는 파도치는 바다만이 참된 광장이었다. 인간의 광장은 없었고, 광장의 중심엔 이념만 우뚝했다.

이후 내가 본 광장은 선거유세와 시위 등 정치적 공간뿐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에게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서 광장이 새롭게 부각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광장이라면 서울 세종로의 광화문 광장과 서울시청 앞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이 각각 만들어낸 곳이지만 두 광장은 지난 10년간 진보 좌파 진영의 독무대가 됐다. 특히 광화문 광장은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농성 천막이 들어섰고,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주 무대가 됐다. 최근에는 우리공화당 천막이 몸부림 치고 있다.

1980년대 여의도 광장은 여러 상념을 낳은 곳이다. 그 시절 휴일이면 초등생, 유치원생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던 추억 때문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에 대비했다. 남북한이 함께 어울릴 통일 광장으로 여의도 광장을 만들었다. 통일은 장엄한 미래다 . 그래서 여의도 광장은 엄청 컸다.

중국 천안문(天安門) 광장의 전승절 열병식은 위압적이었다. 중화대국 광장의 풍광은 역사로 저장됐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풍광 역시 강렬했다. 그 곳에 도열한 초대형 핵미사일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붉은 광장의 크기는 여의도 광장의 절반쯤이었다. 

그 여의도 광장의 해체 시점은 민선단체장인 조순 서울시장 때인 1997년 4월이었다. 명분은 공원(약 23만㎡∙6만9000여평)녹지와 휴식 공간 확충이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 푸른 숲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정책의 깃발엔 ‘개발독재 잔재의 폐쇄’라는 구호가 담겼다. 광장은 초라해졌다.

최근 새 광화문 광장 공모전 결과 발표를 놓고 시끄러웠다. 우리가 생각하는 광장이란 무엇일까. 미국 워싱턴 내셔널 몰 같은 상징적인 광장인가 아니면 중국 천안문 광장 같은 이념적인 광장인가. 두 광장 모두 건축적 위용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일상과는 너무 떨어져 있고, 휴먼 스케일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정치 지도자를 부각시켜 광장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지배-피지배 관계가 부담스럽다.

참으로 우리에게 평화로운 광장의 기억은 낯설었다. 늘 구호를 외쳐대거나 타도할 대상을 향해 증오의 함성을 드높이는 곳이 광장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광화문 광장이 대표적이다. 광장이란 평화로운 휴식을 주는 곳이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는 곳이란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

우리들의 광장은 구호와 촛불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위안과 휴식을 주는 정치적이지 않은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7월8일 울산시청 회의실에서는 ‘태화강역 광장 개선사업 설계 자문회의’가 열렸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 시대를 맞아 울산의 대표적인 관문인 태화강역 광장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새롭게 정비되는 태화강역 광장을 울산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올 연말까지 실시설계가 마무리되고 내년 초에 첫 삽을 뜨게 된다. 2021년 3월이면 울산에 ‘새로운 광장’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무엇보다 광장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소통하는 ‘도심의 숨통’이라는 기능에 충실해야 된다. 울산 시민들은 해외 도시를 여행하면서 풍요롭고 여유 있는 광장문화를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날선 정치 구호나 노동 조합들의 달말마 같은 시위장이 아닌 일상의 여유기 느껴지며 모든 시민이 향유하는 광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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