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술자리서 회자되는 ‘각자도생’ ‘자력갱생’
자기만 살겠다고 아우성친 끝엔 공멸밖에 없어
상호존중·인정으로 지속가능한 사회 만들어야

최범영 울산 남구 삼산동자치위원장

 

한여름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태풍 덕에 무더위가 한풀 꺾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필자의 우둔한 예견은 또 빗나가고 말았다. 남쪽의 습기와 무더운 기운만 몰고 온 탓인지 찜통더위는 더욱 맹위를 떨치는 듯하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날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고 숨이 턱턱 막힌다. 어쨌거나 자연현상이라 여기며 힘들더라도 애써 노력하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오히려 작금의 혼란스런 세상을 보는 것이 더 버겁다. 마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듯 목을 조여 오니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빠진다.

정치판은 터무니없는 정쟁으로 막말과 망언들을 쏟아내 천불이 난다. 우리를 둘러싼 이웃 나라들은 근거 없는 주장과 힘 싸움으로 요란스럽기가 그지없다. 품격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국가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우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 안보는 어떤가. 한반도를 엄습하는 불안한 조짐은 삭으려 들 기미가 없다. 새삼 진중함의 무게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때이다.

요새 식사·술자리마다 어김없이 회자되는 단어가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자력갱생(自力更生)’이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입에 오르내리던 이 사자성어는 이제 ‘처세’의 대명사로 굳어져 가는 모양새다.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경제적 분위기에서 제각기 살 길을 도모해야 하는 건 어쩜 당연해 보인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의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층의 쿨하고 힙한 문화로 포장되는 혼밥·혼영·혼술족도 따지고 보면 각자도생이자 자력갱생의 한 단면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속물적인 인간으로 인식되거나 손가락질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강자(强者)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살아남아야하는 절박함이 앞서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각자 나름의 생존비책을 만들어 활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정의’(正義)와 ‘질서’(秩序)라는 두 기둥은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입으로만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진작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회지도층들을 보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따로 없다. 상생이나 연대, 공존과 같은 사회 규범적 개념들을 들먹여 봤자 목만 아프다. 서민들에겐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이맘때쯤 이었나 싶다. 전북 남원의 한 주택에서 10년째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70대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던 30대 아들이 자택에서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된 소식이었다. 숨진 지 한 달여 만이었다. 방 안에는 번개탄을 피운 흔적과 TV 주변에서 5만원권 16장과 1만원권 40장 등 총 120만원이 들어 있는 돈 봉투가 발견됐다. 돈 봉투 겉면에는 ‘집주인 할머니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경찰은 ‘월세가 밀린 적이 없었다.'는 집 주인 진술 등에 따라 이들이 장례비용을 남긴 것으로 추정했다. 극단적 선택을 할 작정으로 평소에 돈을 조금씩 모은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 설명했다. 아버지는 투병으로, 아들은 우울증과 병시중으로 힘든 세월을 보낸 결과가 죽음으로 끝난 셈이었다.

그렇다. 누군가는 하루만에 120만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이들은 전 재산 120만원을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남기고 떠났다. 더 씁쓸한 얘기는 이웃의 안타까운 죽음을 진정 애도하기는커녕 ‘지옥 같은 세상을 탈출했으니 되레 복 받았다’고 자조하는 분위기였다. 원망조차 할 데 없는 서글픈 현실 앞에서 각자도생, 자력갱생의 길이 그냥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우리가 원하는 자기주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내몰린 측면이 크다는 점이다. 자신이 아무리 용을 써도 개선될 여지는 없고 존재의 의미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의존적인 삶에 기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답은 뻔하다. 진부한 말이지만 모두가 자기만 잘 살겠다고 아우성치고,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쁘면 그 끝은 공멸밖에 없다. 배려와 양보, 상호 존중과 인정이야 말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공자는 말했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라고. 군자는 남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남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므로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세상의 지혜로 삼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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