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투사로 반독재 민주화투쟁 앞장
정치 낭인시절 허기진 동지들 챙겨
사주, 심상치 않았던 삶의 모습

차타고 곳곳다니다 멋진나무 보면
한그루씩 가져와 시가지 곳곳에 심어
새세상 가셔서도 ‘영원한 울산시장님’

 

2004년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 모임’에서 최형우 전 내무장관(가운데)과 함께한 심완구 전 시장님.

파란만장(波瀾萬丈). 기복이 심하고 변화무상한 모습을 말한다. 파란만장한 일생이라면 사주가 심상치 않은 삶의 모습이다. 기억이 또렷하게 각인된 우리말에 ‘뒤죽박죽’이 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도 뒤죽박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물며 길든 짧든 한 평생을 살다보면 뒤죽박죽이 될 때가 없으라는 법은 없다.

울산매일신문 창간직후에 맞은 가장 큰 이벤트가 1992년 총선거였다. 선거를 앞둔 어느날 한 밤에 심완구 야당후보가 탄 승용차가 두왕동쪽으로 가다가 동해 남부선 열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후보의 차가 기차와 충돌했다는 사고는 심상치 않았으며 편집국을 긴장시켜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날이라 호외까지 찍는 소동을 벌였다.

다행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그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증거가 명백하지 않지만 상대후보의 테러 가능성까지 의심케하는 사건이었다. 상대편은 심 후보의 자작극이라며 공세를 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인 심완구가 기억에 각인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심완구 전 울산광역시장님이 6월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인 함정원 여사가 별세한지 약 7개월 만이다.
1972년 야당이었던 신민당 총재 보좌역으로 정계에 입문한 고인은 김영삼 전 대통령 계열 민주화 세력의 한 축으로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정치 낭인시절 서울 무교동에 차린 고깃집 ‘치술령’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허기진 동지들을 퍼먹이다 보니  ‘치술령’은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이후 12~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재선의 정치인으로 각인된 그는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초대 울산광역시장으로 21세기 큰 울산건설의 주춧돌을 놓았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앞서 1985년 12대 총선에서는 민한당 후보로 울주군에서 출마해 ‘YS계의 좌장’ 최형우 전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기염을 토했다. 13대 야당국회의원시절, 마창노련의 노동운동진상조사위원으로 현지조사에 나섰다가 경찰총경의 뺨을 때리는 불상사로 뉴스메이커가 된 적도 있다.

1995년, 자치단체장 선거가 시작되어 명실상부한 민선시대가 열렸다. 울산시에도 시장선거 열풍에 휩싸였다. 3선 실패후 한전고문으로 일했던 그는 출마채비에 나섰다.
당시 공천권을 쥐고 있던 최형우 사무총장이 가로막고 있었다. 둘은 같은 YS계이면서도 정치적 앙금이 만만찮았다. 85년 12대 총선에서 심완구 후보에게 고배를 마신 최형우 후보는 결국 고향을 등지고 지역구를 부산 동래구로 옮겨야 했으니 구원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사연을 기억하는 보좌진들의 말을 종합하면, 심완구 후보는 공천 신청이후 최 총장과의 앙금을 풀기 위해 고심에 빠졌다. 드디어 결단을 내려 면담을 거부하는 서울 중앙당 최 총장 방에 무작정 쳐들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형님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최총장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두 남자가 침묵속에 있다가 최 총장의 노여움이 겨우 풀렸다고 한다. 이후 초대 민선 울산시장에 당선됐으니 무서운 집념이었다.

울산광역시 시절 어느날 심 시장님 부름을 받고 승용차에 동승한 적이 있다. 당시 시가지를 장식할 멋진 나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부산 방면 구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기장 부근 어느 숲에 이르렀을 때 멋진 소나무를 보고 무릎을 쳤다. 심 시장님은 이렇게 멋진 나무들을 눈도장 찍어뒀다 수집해 울산시가지 곳곳을 꾸몄다.

조경전문가 이동철 박사를 초빙해 시청에 자리를 마련, 문수축구장 조경을 맡기는 등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했다. 그밖에 도로 확충, 교통체계를 개선, 울산광역시의 모습을 제대로 갖췄다.
1998년 연합뉴스 본사에 잠시 재직할때였다. ‘심완구 울산광역시장이 치료차 미국에 머물고 있다’는 특파원 기사가 떴다. 그해 11월 무릎 육종암(살코마)수술을 받았다. 이후 2001년에는 폐암으로 전이되면서 또 투병해야 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문수경기장공사에 열정을 쏟으며 힘든 투병생활을 했다. 이어 SK와 함께 울산대공원을 조성했으며 태화강을 생태의 강으로 만드는 밑그림도 그렸다.

그러나 건설 비리에 휘말려 불명예 퇴진하면서 일생일대의 오점을 남겼다. 5년 옥살이 중 여주교도소시절 그의 표정은 밝았다. 희망을 잃지 않고 건강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2007년 육종암과 폐암판정을 받아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암투병시절 면회갔던 지역인사들이 잇따라 검진을 받았다. 당시 유병평씨는 자신도 검진해봐야겠다며 병원을 찾았는데 암판정을 받고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원한 울산시장 심완구님은 열정의 화신이었다. 파란만장, 이 세상은 잊으시고 새세상에서 평안히 잠드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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