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차중 UNIST 디자인·인간공학부 교수  
 

함께 성취하고 이뤄낸 마침표에 큰 의미를 두는 미국
한국은 시간·공간적 개념 모두 시작에 모든초점 맞춰
마라톤은 순위에 관계 없이 완주 했을 때 의미 더 커져
희생양 많았던 우리사회, 이들 위해서라도 계속 달려야

 

유월은 미국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들의 졸업시즌이었다. 졸업시즌이 다가오면 당연하게 누려왔던 무도회와 졸업파티가 전례가 없는 팬데믹으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마지막 축하의 자리인 졸업식마저도 온라인 혹은 드라이브인(drive-in)으로 대체돼 많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고 한다. 팬데믹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 향유돼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는 입학년도가 아니라 졸업년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2016학번이 중요한 한국과 달리 2020클라스와 같은 졸업년도가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동문회에서는 졸업기수를 따지면서 유독 대학에서는 학번을 따진다. 중년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입학년도(학번)가 중요한 숫자와 위계로 인식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대학은 들어가기 힘든 대단한 관문이자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미국에서 입학년도보다 졸업년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시작의 의미보다는 함께 성취하고 이뤄낸 마침표의 의미를 더 가치 있게 공감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간적 개념의 차이는 동서양의 문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거장을 ‘이번(This)’ 역(혹은 정거장)이라고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하철역이나 정거장을 ‘다음(Next)’ 역(혹은 정거장)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이미 엄마 뱃속에서 한살인 것에 비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태어나 1년이 지나야 비로소 한살이 된다. 그런 차이는 공간적 개념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에서 건물의 1층이 유럽에서는 지상층(Ground Floor)이라고 하고, 한국의 2층이 유럽에서는 1층인 것이 대표적이다. 처음 필자가 네덜란드의 친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숫자 ‘1’ 버튼을 눌러 자주 출구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에겐 두발로 디디고 있는 땅이 1이지만, 유럽인들에겐 땅은 0이고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공간부터가 1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개념적 차이를 고려할 때, 한국인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이미 온 것이고, 반면 유럽이나 미국인들에겐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한국인에게 ‘시작은 반’일 수 있다. 그런데 대학만 합격하면, 직장에 취업만 하면, 혹은 어느 집단에 공식적인 소속만 되면 이미 반은 이룬 것일까? 우리는 주위에서 시작은 잘 했지만 종국에는 흐지부지 되고 금방 잊혀져 버리는 많은 것들을 보아왔고 경험해왔다. 한국인의 콤플렉스 같은 냄비 근성도 결국은 ‘시작이 반’이라는 그런 인식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최근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들의 과격한 진압으로 질식사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로 인해 미국 전역이 들썩들썩했다. 이번 사건의 희생양인 그를 단지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국 전역에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삶도 중요하다)”라는 인종차별 반대운동으로 확산됐다. 한 흑인 시민의 죽음을 묵과하지 않고 사회 문제로 이슈화하는 미국의 앞선 시민의식은 팬데믹으로 드러난 엉망진창인 그들의 복지와 의료체계에 비해 놀랄 만하다. (물론, 시위 중에 일부 흑인들에 의해 벌이진 절도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플로이드의 희생을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일상 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공감과 재숙고를 사회적으로 이뤄냈다.

만약 그런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미국처럼 이슈화는 돼도 사회 운동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필자의 회의적 시선은 과거와 현재의 유사한 많은 사례들로부터 기인한다.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통해 입법·시행되고 있는 민식이법은 그 입법 의도를 이해하기보다 운전자를 잠정적 범죄자로 만드는 악법이라는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더 슬픈 것은 “Children lives matter(아이들의 삶도 중요하다)”와 같은 사회적 운동은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 입법의 시작점인 민식이의 부모들을 맹비난하고 있다. 또한 몇년 전 해운대에서 군복무 중 휴가를 나온 윤창호씨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출발점이 돼 만들어진 윤창호법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사고 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장자연 사건, 체육계의 성폭력 그리고 N번방 사건 등 초유의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야한다는 우리들의 분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비단, 이런 현상은 범죄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부는 청년들의 취업이 힘든 세상이라며 그 돌파구로 학생과 젊은이들의 창업을 장려하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작만 하면, 창업만 하면 성공하는 것일까? 아직 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게 잘 될 수 있다며 정부도 지자체도 대학도 그들의 등을 떠민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열에 아홉은 실패한다는 것을. 팬데믹으로 인해 내년까지 미국 스타트업 기업들의 40~50%가 파산할 것이라는 최근 뉴스는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또한, 팬데믹 초기의 선제적 대응으로 세계적의 이목을 받았던 한국, 결국 시작은 잘 했지만 그 성공이 끝까지 이어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이미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논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다음’ 정거장이 ‘이번’ 정거장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포스트 코로나를 논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고민일까? 그 와중에 시민들은 지금, 오늘 하루하루가 가장 힘겨울 텐데 말이다.

마라톤에서 출발은 멜로디가 아닌 총소리로 알린다. 모두들에게 명확하고 공평한 출발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제 막 달리기가 시작되었다고 코스의 반을 완주한 것은 아니다. 순위에 관계없이 끝까지 달렸을 때 의미 있는 것이 마라톤이다. 처음에 조금 뛰다가 포기해버리는, 완주보다는 참가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그런 달리기는 하지 말자. 그렇게 편하게 마라톤을 즐기기에는 우리 사회엔 그동안 희생양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야 하지 않을까? 시작은 성공의 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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