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당시 시청앞 외환은행 일대와 삼산벌 풍경. 1979년에도 비슷했다. ‘울산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TBC 방송뉴스까지 취재…다사다난했던 주재기자
부산에서는 연일 불길한 ‘부마사태’ 소식 들려와
NHK TV 새벽 뉴스로 ‘10·26 대통령 시해’ 알게돼

 

 

김병길 주필

1979년은 필자에게 축복의 해 였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혼 3년만에 딸 미루(美塿)가 태어났다. 5월 15일생인 미루는 태어난지 3개월여만인 8월 20일 강보에 싸여 아버지 부임지 울산에 왔다. 지금 실리콘밸리 페이스북에서 일하고 있는 미루와 생애 첫 여행이 만만찮았다며 농담을 주고 받은 적이 있다.

울산 부임 후엔 중앙일보·동양방송(TBC) 부산지사서 1주일간 연수가 있었다. 울산이 부산지사 관할이었기에 방송취재관계 연수가 필요했다. 당시 TBC 부산지사 보도부장은 신원호씨였다. 언양 출신인 신 부장은 후일 KBS 울산방송국장과 경상일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81년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합병돼 20여년후 KBS 울산방송국장을 역임했다.

신문·방송 기자를 겸임하는일이 만만찮았다. 큰 사건이 터지면 신문기사를 쓰기전 방송 리포트부터 해야 했다. 신문기사와 방송기사 두 벌을 써야 했으니 바빴다.

1979년 당시 언론환경은 지금 생각하면 석기시대 였다. 열차편으로 본사에 기사를 송고 했다. 저녁시간 부산발 서울 청량리역행 중앙선 열차가 울산에 도착하는 시각이 오후 7시께이었다. 울산역에 가서 기차편으로 기사 원고를 발송하면 밤새 달린 기차는 아침에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본사에서 청량리역에 가서 기사봉투를 챙긴 후 12시께 발행되는 신문에 실었다.

취재가 늦은 중요기사가 7시 열차시각을 아슬아슬하게 다툴 때는 전화로 역장에게 부탁해 열차 출발 시각을 5~10분 늦춘 적도 있었다. 구도심 가로수 다방 건물 3층에 있던 중앙일보 지사에서 옥교동 옛 울산역 사이 거리가 크게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워낙 시간을 다투다 보니 신문쪽 기사와 방송쪽 기사가 봉투가 바뀐 채 배달될 때도 있었다. ‘××× 했다’는 기사가 방송보도국에 배달 되고, ‘××× 했습니다’는 기사가 신문편집국에 배달될 때도 있어 본사데스크가 전화로 호통을 쳤다.

당시엔 팩스도 없었으니 큰 사고나 마감 후 긴급기사는 전화로 송고해야 됐다. 그러니 한자 이름 등은 일일이 설명을 해야 된다. 가령 ‘允’자는 ‘오징어 윤’자로 설명하면 서로 잘 통했다.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울산경찰서(지금 동헌 옆)에 들러 밤사이 사건사고를 챙기는 일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드물었다. 경찰취재가 끝나면 태화다리 건너 울산시청 기자실로 출근했다. 지금 남구는 큰 도심이 되었지만 그땐 시청 건물만 우뚝하게 보일 뿐 시청 앞 삼산벌이 허허 벌판이었다.

기사 경쟁은 치열했다. 석간신문은 중앙-동아, 조간신문 조선-한국이 경쟁지였다. 동아일보 P기자는 부산에서 매일 출근했다. 기자밥을 필자보다 몇년 더 먹은 P기자는 여유만만 했다. 그런데도 기사 낙종이 늘 불안해 보였다. 토요일 이면 골프장에 가야할 P기자는 중앙일보 김 기자가 혹시 큰 기사를 취재하지 않을까 안절부절이었다.

어느 주말 P기자는 경주컨트리클럽 동행을 요청했다. 중앙일보 김 기자를 두고 골프를 치러가자니 불안해 골프 문외한인 김 기자에게 골프장 구경을 핑계로 동행을 요청했다. 필자는 P 기자가 편안히 공을 치는 동안 골프장 구경을 잘했다. 

1979년 정국은 어수선했다. 이른바 ‘부마사태’가 연일 고조되고 있었다. 연일 부산에서 들리는 소식은 불길했다. 후일 들을 수 있었지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은 몇천명 희생시키더라도 부마사태를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고집해 김재규 정보부장과 마찰을 빚었다. 

드디어 10월 26일,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일본 NHK TV 뉴스가 잘 잡혀 수시로 시청했다. 10월 27일 아침 6시 뉴스에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 뉴스가 떴다. 처음엔 긴가민가 보고 있자니 사태가 심상찮았다. 국내 TV 채널에서는 아직 뜨지 않는 뉴스였다. 그때 마침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울산에 내려와 있었다. 이 비서실장 쪽으로 전화를 하니 밤새 상경하고 없었다. 평소 자신은 박정희교 교도라고 부르짖던 이후락 전 비서실장이 아니던가.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저지른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전모는 10월 27일 오후 늦게까지도 제대로 정리돼 보도되지 않았다.

10월 26일 이후 정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격동의 대통령 유고 정국이 울산주재 기자의 안테나에는 제대로 잡히지 않아 답답한 나날를 보내야 했다. 수시로 서울본사로 부터 겨우 귀동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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