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아들들과 함께 식사한 후 걸어서 청운동에서 원서동 현대사옥까지 출근했다. 옛 중앙청 앞을 지나고 있다. 몽구, 몽준, 몽헌 형제들도 보인다.

 

아들들과 청운동서 원서동 사옥까지 걸어서 새벽 출근
옛 중앙청앞서 기다리다 카메라 기자와 함께 취재
간 밤에 꾼 꿈 묻자 “옛날 고향서 도망치던 꿈 꿨지”

 

김병길 주필

고(故) 아산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0주기 제사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정 명예회장의 옛 자택에서 열렸다.

정 명예회장은 생전에 매일 오전 5시면 자식들을 청운동 집으로 불렀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을 함께 먹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걸어서 원서동 사옥까지 출근하기도 했다. 원서동 현대사옥은 필자가 다닌 옛 휘문고등학교 교정, 그 자리다.

1978년 어느날 정회장과 아들 몽구, 몽준, 몽헌 등이 출근하는 모습을 사진기자와 함께 취재한 적이 있었다. 3월초 였지만 새벽 공기는 차가왔다. 정 회장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당시 중앙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사진기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듯 걸음을 멈추고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싱거운 사람들이네, 출근길을 막으면 어쩌나” 하면서 껄껄 웃었다. 취재를 나왔으니 한마디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회장님, 간 밤엔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의아하다는 듯 필자를 쳐다보더니 “꿈꾸었지, 옛날 어릴때 고향에서 서울로 도망치던때 꿈꿨지” 그러면서 또 껄껄 웃고 원서동 사옥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는 찬바람을 가르며 몽구, 몽준, 몽헌 등 아들들이 뒤따랐다.

그날 아침 왕회장 출근길 스냅사진과 간 밤 꿈얘기가 실린 기사는 낮 12시에 뿌려진 석간 중앙일보에 실려 화제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유신 이후 처음으로 연두교시를 발표했다. 이날의 발표는 후일 ‘1·12 중화확공업화 선언’으로 불렀다. 1·12 선언에서 ‘마이카’ 시대를 달성하겠다는 말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에 종합자동차 설립허가를 받았으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970년 12월 29일 미국 포드자동차와 50대50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포드측은 1국 1부품 생산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반면 현대는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갈등을 벌이다 1973년 1월에 해약 하고 말았다.

현대는 그 와중에도 1973년 6월 최초의 국산 시작차(試作車) 1호를 완성했다. 이해 7월 18일부터 8월 25일까지 39일 동안 자동차 이름을 공모했다. 전국에서 5만8,000여통이나 되는 응모엽서가 쇄도했다. 9월 25일 최종 결정된 최초의 우리 국산차 이름은 ‘포니(조랑말)’ 였다.

현대는 울산 염포 인근에 1974년 7월 1억 달러를 들여 연간 생산 능력 5만6,000대 규모의 자동차공장 건설에 착공, 1975년 11월에 완공했다. 다음해 1월부터 생산 출고된 현대 ‘포니’는 그해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를 점유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6월엔 드디어 중미 에콰도르에 최초로 국산 포니 6대를 수출하면서 해외시장 공략에 나서게 되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으로 자동차 산업과 함께 조선산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현대는 1972년 3월 23일 기공식을 한지 2년 3개월만인 1974년 6월 28일 울산방어진에 현대조선소를 완공했다.

놀랍게도 8천만 달러를 들인 조선소를 지으면서 26만톤급 대형유조선 두 척을 동시에 건조해 조선소 완공과 함께 진수시키는 깜짝놀랄일이 벌어졌다. 현대조선소 완공은 당시 “세계 조선소를 최단시간 내에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 형제들은 두루마기 한 벌로 새해 세배를 돌았다. 내가 먼저 두루마기를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세배하고 오면 인영이, 순영이가 그 두루마기를 받아 입고 차례로 세배를 다녔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엔 어린시절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6남 2녀중 막내로 두루마기 마지막 순번이었을 정상영 KCC 명예회장도 지난 1월 3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의 별세로 ‘영(永)자’ 돌림을 쓰는 현대가(家) ‘창업 1세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인은 외모나 말투 등이 맏형과 흡사해 ‘리틀 정주영’으로 불리기도 했고, 21살 터울인 큰 형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으며 따랐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장남 뿐 아니라 형제들 모두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가 됐다. 정씨 형제들은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댐,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중동건설 붐을 이끈 현대건설 신화를 만들어 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단시간에 건설한 소양강 댐 공사 역시 기적이었다. 필자가 춘천시 인근 춘성군 2군단 비행장에서 군 복무를 할때 공사과정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고 정 회장과는 1980년 현대중공업 영빈관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1992년 대통령 선거 울산 유세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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