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철·이한열 사망기사와 사진 ‘6월 항쟁’ 불질러
사진부장, 보안사 체포 각오하고 ‘이한열 사진’ 실어
17일간 전국 시위 2,145회·최루탄 35만발 발사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과장법에 동의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1986년에 경제호황이 불어닥쳤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에 대한 망각을 부추기고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까지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1985년 9월 G5 정상회담을 계기로 달러와 국제금리, 유가가 동시에 하락하는 이른바 ‘3저 시대’의 서막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같은 ‘3저 현상’은 수출에 목을 걸고, 외채 상환과 석유 전량 수입 부담을 지고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엔 엄청난 행운이었다. 게다가 쌀이 남아돌고,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으로 1986년 9월부터 양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것은 호황심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분수를 모르는 소비열풍이 불어닥쳤다. 이같은 소비열풍에 5공 정권이 앞장서기도 했다. 해외언론은 88서울올림픽 준비 상황을 보도하면서 ‘분수를 모르는 호화판 잔치’라고 비아냥댔다.
1987년 3월엔 사상 처음으로 하루 주식거래량이 1억주를 돌파하는 등 증권사 호황이 절정에 달하자 언론은 과열 자제를 외쳤다.
증권 뿐이랴, 거품이 낀 호황으로 생겨난 잉여자본은 갈 곳을 몰라 헤매게 되었다. 전국의 부동산 값의 폭등을 초래,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재벌들 역시 몸 부풀리기에 나서 경제 버블화를 선도하면서 대마불사론(大馬不死論)의 신화를 맹종하는 거대한 괴물로 변신하게 된다.
이같은 3저 호황은 1989년을 고비로 사라졌지만, 논쟁은 남게됐다. 친정부 인사들은 이를 5공 치적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자 “제비다리를 분질러 놓고 나서 고쳐준 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는 반론이 제기됐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 분실로 연행된 후 무지비한 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석간 중앙일보 1월 15일자 사회면엔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하의 2단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법조 출입 기자 신성호가 15일 오전 여느때처럼, 기사 체크를 위해 검찰 간부들 방을 취재하다한 간부의 방에서 무심코 나온 “경찰은 큰 일 났어”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취재에 나서 낚아 올린 특종이었다.
마감시간이 지난 뒤 신 기자가 사회부 데스크에 긴급전화로 알려온 기사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사회부 데스크였던 G부장은 윤전기를 세우고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기사를 실어 특종기사로 기록됐다. “책상을 ‘탁’치자 ‘억’하고 쓰러졌다”는 경찰 발표로 한 때 단순 쇼크사로 위장했다. 그러나 16일자 신문에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의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 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렸다.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의 여파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를 무력화 시켰다. 이어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신문들이 ‘보도 지침’을 어겨가면서까지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은 민주화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대세라는걸 시사 하는 것이었다.
6·10 항장에서도 4·19혁명 전 ‘김주열 사망’처럼 한 장의 사진이 큰 기여를 했다.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는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
정 기자는 후일 “최루탄 가루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뿌연 안개 속 처럼 일어나 카메라와 손에 하얗게 내려앉았다”고 회고했다. 정 기자의 사진은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렸는데 이 한장의 사진은 위력을 떨쳤다.
언론 검열을 받는 상황에서 이같은 사진을 보도하는 일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편집국 내에서도 데모를 부추길 수 있는 사진이라 곤란하다는 일부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L사진부장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약속하에 실리게되었다.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뜻했다.
바로 이 한장의 사진이 신문에 보도된 다음날부터 대학가에는 대형 걸개 그림이 걸렸다. 시위 학생들은 이 사진을 손수건·스카프 등으로 제작해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군사 독재 정권의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결정적인 사진이 되었다.
6월 9일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연 인원 50여만명이 나섰다. 연행된 사람만해도 3,831명에 이르렀다. 다음날도 이어진 ‘6·10 항쟁’은 해외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된 6월 18일 시위에선 전국에서 약150여만명이 나서, 1,487명이 연행됐다. 6월 19일 오전 전두환은 군병력 동원 계획을 세웠으나 오후 4시께 취소했다.
“만약 시위 진압을 위해 군 병력을 투입했다면 일부 군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한 측근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나섰다. 필자의 기억으로 퇴근 때의 서울 시가지 중심 거리엔 최루가스로 가득했으며 혁명전야처럼 느껴졌다. 6·10 시위 이후 17일간 전국에서 열린 시위는 2,145회, 발사된 최루탄은 35만발인것으로 집계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