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거짓말’로 시작된 80년대, ‘거짓 청문회’로 막내려
노태우, 골치아픈 전두환 스위스 추방 ‘레만호 계획’
해직 언론인 526명, ‘언론학살 원흉 5인 처벌’ 무산
신문 1면 머리기사는 수많은 기사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기사다. 그 기사가 독자들의 눈을 잡아끌려면 몇 개의 단어를 엄선해 제목을 붙여야 한다.
2011년 10월 6일자 뉴욕 포스트에는 ‘스티브 잡스 죽다’는 헤드라인이 실려있다. 1861년 뉴욕 헤럴드의 헤드라인은 ‘전쟁이 시작됐다(The War Began)’로 단순하다. 하지만 이 전쟁은 4년동안 6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남북전쟁이다.
사안이 중대하면 표현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1941년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가 게재한 진주만 공습 기사 제목도 ‘일본, 미국과 전쟁에 돌입(Japan. Us. At War)’이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있는 저널리즘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사실과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인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1989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당 대표가 모여 영수회담을 열었다. 저녁 7시에 시작하여 자정이 넘도록 계속된 이날의 영수회담에서 ‘1노3김’은 술이 거나한 가운데 사실상 5공 특위의 종결을 결정지어 버렸다.
‘전두환씨의 증언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한다. 그 절차는 서면 질의서를 제출한 후 일괄 답변을 듣는다. 이 증언은 1989년 연말까지 완료하고 그 후로는 더이상 5공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1990년 2월의 임시국회에서 특위를 해제한다’는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태우는 백담사에 유배된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에 출석해 증언해줄 것을 설득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요구대로 연내 국회 증언을 약속하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측근들을 소집해 대책 회의를 열었다. 측근들의 반대에도 전두환은 국회 출석을 결정했다. 백담사 캠프에서 국회에서 증언할 내용의 방향과 수위도 조절되었다.
89년 마지막날, 12월 31일 새벽, 유배지 백담사에서 출발한 전두환은 오전 10시 국회에 출석했다. 이날 전두환이 증인으로 출석한 국회 청문회는 14시간여 진행됐으나, 전두환의 증언 시간은 고작 두시간도 안되었다. 나머지 대부분 시간은 흥분한 야당 의원들의 규탄과 이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맞대응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일곱차례에 걸쳐 정회를 했다.
몇 장면을 돌이켜보면 오후 4시 50분경 전두환은 ‘광주 발포’ 문제에 대해 “자위권 행사로 초기에는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사된 것”이라고 했다.
이에 평민당 특위 위원들이 “양민학살이 자위권이란 말이냐”고 질책하면서 다섯번째 정회에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속개된 증언에서도 전두환은 “자위권 행사는…”이라고 반복했다.
이때 소설『 꼬방 동네 사람들 』 을 쓴 이철용 의원은 증언석으로 다가가 전두환에게 “당신은 살인마다”라고 외쳤다. 전두환과 동향인 권해옥(합천 출신) 의원 등이 맞고함과 육탄으로 막았고 여섯번째 정회가 선포되었다.
전두환이 퇴장한 뒤 노무현 의원은 증언대를 향해 명패를 집어 던졌다. 후일 노무현은 자신은 명패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을 뿐이며 “그것도 전두환씨에 대한 분노보다는 당시 내가 소속하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내동댕이쳤던 것”이라고 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전두환의 증언은 핵심적인 내용을 비껴갔고, 자신의 통치행위에 대한 해명성 답변으로 일관해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당시 한 여론 조사는 전두환의 증언 태도에 80.6%가 “불성실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한 민주당 의원은 전두환의 증언과 답변을 두고 “정치인 모두가 전씨에게 확실한 면죄부를 준 방조법으로 전락했다”며 흥분했다. 따라서 “전씨를 증언거부로, 위증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앞서 청와대는 비밀리에 전두환 해외추방계획을 꾸몄다. 작전명 ‘레만호 계획’이었다. 전두환의 한 측근은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김포공항으로 이동해 스위스로 가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만들었다.
국회 증언이 끝난 뒤 전 대통령의 존재는 노정권으로서는 부담이 됐었다. 백담사에 두자니 계속 지지자들과 접촉하고 서울로 귀환하겠다는 요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6공 측은 여러 차례 백담사로 사람을 보내 “백담사에서 고생하느니 해외 장기 여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종용했다. 이들은 ‘더이상 신변 보호는 어렵다’며 은근히 위협하기도 했다. 해외 추방이 무산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찌 됐던 그의 거짓말로 시작된 80년대 초처럼, 80년대 마지막 날인 89년 12월 31일도 전두환의 막무가내식 부인(不認)과 거짓말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80년대와 함께 전두환은 사라졌는가?
그렇진 않았다. 그의 분신은 살아있었다. 바로 그를 예찬하고 그런 과거가 옳았다고 고집부리는 자들이 있었다.
1989년 10월 11일, 80년대 해직언론인협의회는 526명의 서명을 받아 80년대 언론학살 원흉 5인(허문도, 이상재, 이원홍, 이진희, 권정달)의 직권남용에 대해 처벌을 촉구하는 고소장을 서울지검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처벌되지 않았고 해직 언론인들은 이후 길고 긴 투쟁에 들어서게 되었다. 80년대 민주화투쟁은 반성 없는 정치인들로 인해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