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왼쪽)·이재명 경기지사(오른쪽). 연합뉴스
김진영 편집이사

기적 울린 대선열차, 여야 대표주자 출마 선언 
모두 소통정치 외치지만 불통은 정치의 고질병 
행동하는 실천정치 제대로 보여주는 정치 희망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으로 살겠다.” 버트런드 러셀이다. 런던의 창가에 앉아 뉴욕 사람들에게 세상을 읽어 준 그의 이 문장은 사후 40년이 지난 뒤 칼럼집으로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같은 지역에서 언론사를 옮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결정인가는 결정의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른다. 그 결정의 시간 동안 잠시 다시 잡은 책이 러셀의 문장이었다. 한세기전,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유사한 고민을 했던 러셀은 런던에 앉아 대서양 건너 미국 일간지에 4년 동안 고정칼럼을 썼다. 대부분은 책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사라진 그의 글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무려 반세기 후의 일이다. 그 칼럼집의 제목이 ‘런던통신’이다. 필자가 새로운 칼럼의 제목을 ‘매일통신’으로 정한 이유다. 
러셀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한 세기를 산 철학자다. 수학을 좋아했던 청년이 철학에 빠져 세상과 싸우다 자유연애와 평화주의자로 생을 마감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그의 삶을 따라가면 문득, 뒤통수를 후려치는 놀라움은 없지만 경직된 관념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신비로운 경험은 장담할 수 있다. 그가 정치에 도전한 적이 있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현실 정치에 뛰어든 청년시절의 일이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던 시절, 러셀은 하원의원에 도전하며 여성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외쳤다. 남성우월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그 시절, 그에게 날아든 것은 썩은 달걀과 쥐의 사체였다. 문제는 달걀과 쥐를 던진 이들이 우월주의에 빠진 남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오래된 고전이다. 일부 극렬 여성들은 극악하게 러셀의 선거운동을 방해했고 심지어 그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당연히 그의 정치도전은 굴욕으로 끝났다. 
윤석열이 대권행 티켓을 끊자 8개월 남은 대선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현재의 구도대로라면 윤석열과 이재명이라는 2강 구도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대선열차의 인원제한은 없다. 이미 올라탄 이들도 있지만 다음 역쯤에서 기다리는 숨은 승객 한둘이 혼자 끊어둔 열차표를 안주머니에 두고 만지작거리고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열차에 오르는 이들이 가진 정치에 관한 생각이다. 열차표를 끊는 순간 그들은 대체로 종착역까지 무사히 달려가 플랫폼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환호성을 지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러셀은 인간사를 이렇게 일갈했다. “세계사에는 네 종류의 시대가 있었다.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대, 아무도 자기가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 현명한 사람들은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어리석은 사람들은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첫 번째 시대는 안정의 시대고, 두 번째는 서서히 쇠퇴하는 시대, 세 번째는 진보의 시대였지만, 네 번째는 재앙의 시대였다.” 출사표를 던진 이들에게 러셀이 주석을 단다. 스스로 잘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출마했겠지만 순간순간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언이설에 귀가 열리고 쓴소리는 지워버리겠지, 그러다 문득, 유아독존, 내가 아니면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이 출사표를 접어야하는 최적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의 상상이다. 
실패한 정치 지망가의 뒷담화쯤이야 무시해도 된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주유천하로 정치 가이드북을 세일즈하고 다닌 공자를 보자. 문전박대에 망신을 죽을 먹듯 당한 공자였지만 오늘 정치인들의 서재엔 공자 열전부터 논어 풀이까지 공자로 가득하다. 말이 나온 김에 공자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공자는 정치인들의 말 잔치를 ‘행이불언(行而不言)'이라는 네 글자로 경계했다. 행동하지 않는 말은 천박한 정신을 감추려는 분칠에 불과하다는 죽비소리였다. 러셀이 그랬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전쟁반대를 외치며 행동하는 지성을 실천했다. 공자가 정치를 실천에 방점을 둔 이유는 입만 살아 있는 정치에 대한 경계였다.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가 도둑 떼가 들끓는 현실에 대한 답을 구했을 때 공자는 계강자에게 너부터 욕심을 버려야 백성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답을 들은 계강자의 얼굴이 어떻게 됐을지는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저마다 불의와 맞서고 약자의 편에 서며 행복의 나라를 보장하는 이상세계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이명박이든 박근혜든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모두가 출발의 시간에는 국민과 하나가 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른바 소통 정치다. 현실로 돌아가 보자. 소통을 외친 모든 대통령이 임기가 끝날 때는 어김없이 불통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불통은 대통령이 인지하지 못한 고질병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온 사람에게 보고 싶지 않은 것이나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불편하다. 
정치신인에게 국민은 열광한다. 불통에 대한 반발이다. 안철수가 그랬고 이재명의 사이다 발언도 재미를 봤다. 최근의 윤석열 현상이나 이준석 바람도 그런 식의 흐름을 탔다. 출사표를 던지는 이들의 화법은 명료하다. 정치는 썩었고 정치인은 부패했다. 진단은 간단하지만 해법은 모호하다. 정치 입문서에는 해법이 없다. 그래서 선거가 시작되면 진단의 목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국민은 해법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에 열광한다. 기성정치 타파와 중도확장이라는 낯익은 용어가 선거 초판에 득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입술만 붉히고 외치는 진단은 그저 얄팍하고 천박한 말장난일 뿐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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