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근
시인·문화평론

향토 간식 ‘옥수수’ 수확 끝날 즈음 찾아온 ‘처서’
낭만 가을 맞는 ‘마중물’ 언뜻 보이는 높은 하늘
삽상한 바람 이는 길목에서 벗과 영상통화 어떨까

지치고 늘어지기 쉬운 여름 날 입맛 돋우는 간식꺼리는 한순간 기력에 도움이 된다. 굳이 보양식이 아니라도 옥수수는 허기를 채우기에 좋은 곡물이다. 옥수수 생산량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강냉이밥, 강냉이수제비 등으로 주식뿐 아니라 옥수수로 올챙이 묵 같은 별식을 만들어 간식으로 즐기기도 한다. 옥수수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수확 시기가 중요해서 이때에는 바빠서 고사리 같은 손주들 손도 빌려 쓸 만큼 손품도 많이 간다. 
군것질꺼리가 전무한 시절 아이들은 옥수수 따는 날이 기다려진다. 어른들이 옥수수 줄기를 낫으로 토막 내 주면 입으로 껍질을 까내고 속대를 씹을라치면 어찌나 달던지, 정신없이 억센 껍질을 입으로 벗기다보면 입술이 찢어지는 것도 모른다. 물론 어른들에게도 그 단맛에는 최면 불구다. 이런 시절 초등학교에서는 급식으로 ‘강냉이 죽’이 정기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옥수수는 버릴 것이 없다. 삶아 먹는 맛은 물론 치통을 앓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옥수수 속대를 삶아 가글하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가라앉는다. 또 옥수수 수염은 이뇨작용에 효험이 있으며, 바짝 말린 속대는 ‘효자손’으로 제격이다. 
옥수수 알을 빻아 가루로 빵, 과자, 물엿, 술을 만들며 녹말로 포도당, 사업용품 등을 만들 수 있으며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쓰기도 하고 요즘은 생일 케이크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친숙한 향토 간식 옥수수 수확이 끝이 날 즈음에 농가는 잠시 한가하다. 이 때를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 해 풍자적 지혜로 더위를 보내자면 입추가 오는 듯 가고 이윽고 처서다. 
처서(處暑), 더위를 ‘물리치다’라는 말이다. 처서부터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산야에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아 두엄 만들 준비를 하거나 벌초 계획을 한다. 옛 선비들은 장마에 꿉꿉해진 옷이나 책을 응달건조하거나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이 무렵에 했다. 절기문화는 오묘해서 처서를 기점으로 아침저녁 신선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처서 날씨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비록 가을 기운이라고는 하지만 햇살은 바짝 따가워야 하고 날씨는 쾌청해야 벼가 무르익고 과실이 튼실하게 영근다. 
엊그제 하필이면 처서 날에 오마이스 태풍이 오두방정을 떨며 도시 구석구석 할퀴고 갔다.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하는데, 처서가 오면 ‘십리에 곡식이 천석씩 줄고 독안의 곡식마저 준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처서에 비가 오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맑은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바짝 받아야만 나락이 제대로 피는데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고 결국 썩기 때문이다. 이는 처서 무렵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처서는 낭만 가을을 맞이하는 마중물 같은 절기인 것이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사람들이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웃다가 입이 이렇게 찢어지고 꼬부라졌다네”라고 대답한다. 모기도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지고 가는가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 애간장 끊으려 가지고 가네”라고 말한다.’ 
극성이던 모기 입이 삐뚤어지거나,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가 애를 끓게 한다는 해학적 ‘절기문화’표현이다. 이제 언뜻언뜻 높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도 남아 있을 옥수수 한솥 쪄 내어 놓고 삽상한 바람이 이는 길목에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가져보자. 그리고 풍성한 가을맞이 마중물을 만드는 심정으로 대면할 수 없는 벗에게 영상통화 한번씩 하자. 

이병근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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