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영화연구가

마을 어귀를 지나 공사가 한창인 큰길로 접어들자니 때마침 까마귀 떼의 향연이 펼쳐진다. 빨간 신호등 아래 멈춰 선 자동차 안에서 전깃줄 위로 줄지어 앉은 까마귀들을 살핀다. 그러자 수많은 생각이 오버랩(overlap)되며 찰나를 스치다 잊히지 않는 한마디가 있다. ‘이 또한 훗날엔 소소한 추억 한 컷으로 레이아웃(layout) 돼 그리운 장면으로 자리매김을 하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길 위를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 이유는 바로 유턴(U-turn)은 있으되 후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직 직진만이 가능하며 늘 오늘에 사는 것이다. 인생이란 재방송이 안 되는, 생방송만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다. 여기에는 단지 사람들의 일상, 그 인물(人物)에만 국한할 수는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추억 어린 자리 ‘터’ 또한 맥을 함께한다 할 것이다. 이를 테면, 살고 있는 지역의 기차역이 그러하다. 2021년 10월 24일로써 100년의 역사를 지닌 호계역(虎溪驛, Hogye Station)이다. 이곳을 이용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여행의 추억이 함께하는 그리움의 자리일 것이다. 머지않아 폐선이 된다고 하니 이젠 추억 속 그리움의 터로 마음속에 머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에 필자는 추억 어린 그곳을 떠올리며 허허로운 마음을 〈호계역, 그리움의 터〉로 엮어보았다.
동대산 구비 돌아 이고 지고 다다르니
아직은 고요한 적막이 반기는 새벽녘이라
내 땅 내 나라 넋 되살림에 쉼 없이 내달리니
여기는 그리움의 땀내가 먼저 반기는 호계역이라
일백 년 전, 첫걸음마로 기다림의 문을 열었다
나 어릴 적 할머니 손 잡고 장날 마중 나섰으니
그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하루 이틀 사흘이라
곧 돌아보고 또 돌아다보자 기나긴 날들이었으니
어느덧 코흘리개 아이가 어엿한 어른 되어 왔노라
부산 가네 서울 가네, 잡은 손 흔들며 배웅하니
이녁의 해는 스르르 저물어 달빛 어린 봄밤이라
떠나는 이도 보내는 이도 마음은 하나였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고 남은 터 이곳이니
긴 밤 개구리 울음에도 단아한 기다림이라
보낸 이도 떠난 이도 언젠가 돌아오리니
그리하여 다시금 찾아온 날이 오늘이로다
이러하여 또 한 번 그리움 한자락에 다다르니
비로소 앞마당에 낙엽이 나뒹구는 가을날이라
꼭 오늘만 같구나, 이제 그리운 이를 찾아 떠난다
가슴속 가득 찬 고독과 설렘과 기다림이라니
넘치는 그리움으로 사랑과 꿈을 찾아 나서노라
보랏빛 새벽이 아직 눈 뜨지 않은 오늘이다
그곳에 다다르자 뽀얀 아침이 문을 열어주니
반갑고도 기쁜 마음에 그리움이 사르르 녹아나라
이곳은 바로 우리 만남의 터, 호계역이로다
추억은 영원한 무형의 존재로 오직 시절마다 달리하는 형색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두어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왜냐하면, 우리네 세상에는 뜻하지 않은 순간들이 추억으로 함께하고 있기에. 그리하여 오늘은 ‘시절 추억·그리움’의 아련한 사정에 대해 그린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승원 감독의 《세자매: Three Sisters》(2020 한국)로 출연 배우는 문소리, 김선영, 장윤주, 조한철, 전봉식, 김가희, 임혜영, 김성민, 김미경, 이송희, 김지안, 정예나 등이다. 영화는 세 자매를 중심으로 하는 좌충우돌, 특히 잊히지 않는 고향 마을에서의 추억과 그리운 터를 찾아가는 모습들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정세교 감독의 《오! 문희: Oh! Gran》(2020 한국)로 출연 배우는 나문희, 이희준, 최원영, 박지영, 이진주, 전배수, 김예은, 김선경, 김정영, 김학선, 박예찬, 최광일 등이다. 영화는 모자(母子)가 함께하는 우여곡절, 치매 어머니와 아들 간의 달곰쌉쌀한 추억과 그리운 터를 찾아가는 모습들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이성재 감독의 《비밥바룰라》(2017 한국)로 출연 배우는 박인환, 신구, 임현식, 윤덕용, 김인권, 이채은, 이나라, 최선자, 성병숙, 정영숙, 장원영, 강승완 등이다. 영화는 네 명의 시니어벤져스(Senior-Avenger)의 멋진 황혼 맞이 열망으로, 이는 곧 청춘의 삶과 추억을 아우르며 아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들을 보여 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치열한 오늘을 맞고 있다. 설령, 그 무게는 다를지언정 추억과 그리움 또한 저마다의 가슴속 깊이 자리할 것이다. 문득 외로워지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다면 한 편의 영화로, 또 ‘시절의 추억과 그리운 터’를 찾으면 어떨까. 필자가 길 가 까마귀 떼의 행로를 위안으로 마주하며 나아가듯이!

김정수 영화연구가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