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3월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된지 1년 9개월만에 보석으로 풀려날 때 모습. 연합뉴스
김진영 편집이사

정보수장 자리 퇴임 후 ‘X-파일’ 등 남발
김대중 정부 정상회담 뒷거래 오명 여전
민감부분 건드리는 관종근성에 ‘피로감’

'푸틴플레이션(푸틴+인플레이션)'이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오늘 아침 내 차에 넣는 휘발윳값이 푸틴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지만 거침없는 물가의 뜀박질은 거침이 없다. 알통맨으로 알려진 푸틴의 광기는 배후에 시한부 생명의 암세포가 있다는 건강이상설이 퍼지고 있지만, 역대급 무역 흑자를 기록 중인 러시아는 일견 승승장구 태세다. 석 달을 넘긴 푸틴의 광기가 언제 그칠 줄 모를 일이지만 러시아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잇따른 철수와 첨단 산업 관련 부품 수출 금지와 유망 인재들의 탈러시아는 혹독한 겨울 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문제는 푸틴의 광기에 흔들리는 지구촌이다. 당장 바이든 미 행정부는 치솟는 물가에 손을 놓았고 구름 잡는 소리라 치부하던 인플레이션 사태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미국의 기침 소리는 유럽은 물론 우랄산맥을 넘어 중동과 아시아까지 폭풍 전야로 몰아가고 있다.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듯 연일 내림세가 이어지고 생활물가는 꼭짓점을 모른다며 질주하는 모양새다. 세상이 이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뒤바뀐 여야가 삿대질이고 전·현직 대통령 집 앞은 꽹과리와 확성기가 거칠고 참담한 소음공해를 양산하고 있다. 이 와중에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정보사령탑에 있던 박지원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질로 이목의 중시에 섰다.

대한민국 관종(관심종자) 서열 10걸의 당당한 면모다. 박지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국정원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들 존안 자료, 'X-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고 박지원식 '썰'을 풀었다. 진행자가 X-파일에 민감한 반응을 하자 "공개되면 굉장히 사회적 문제가 되고"라며 심판자 같은 발언을 했다. 그리고는 "불행한 역사를 남겨 놓으면 안 된다. 특별법을 제정해서 폐기해야 하는데 못했다"고 마치 자신은 너무 하고 싶은데 정치권이 이를 막은 것처럼 슬쩍 책임을 돌렸다. 박지원은 이 방송으로 관종본좌에 오르자 이번에는 한 발 더 나갔다. 한 종편과의 인터뷰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X파일'도 있다"며 윤 대통령이 취임 하자 마자 다음날 자신을 내쫓았다며 "섭섭하다"는 말도 남겼다. 결국 쫓겨난게 섭섭해서 '썰'을 풀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발언이 나온뒤 파장이 이어지자 국정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원장 재직 때 알게 된 직무사항을 공표하는 것은 전직 원장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경고했다. 그 정도를 모르고 언론 인터뷰를 한 박지원이 아니지 않나. 기다렸다는 듯 박 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 발언시 더욱 유의하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발언이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자신감이다. 이정도면 관종의 값은 충분하다. '정치 9단'의 입질이 복선을 깔고 있다는 것은 예견된 수순아닌가. 'X-파일'을 툭 던지니 존재감이 부각된다. 정치생명 연장은 일단 성공이다.

박지원이 누구인가. 그는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 10년 동안 북한 정권이 핵 개발을 추진하게 만든 주역으로 지목되는 자다. 지금 아침마다 풍계리나 영변으로 위성 감시망이 집중되는 뿌리에 박지원이 있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정상회담 뒷거래로 이뤄진 대북 불법 송금액 4억 5,000만 달러의 주변에 박지원과 민주당 핵심인사들이 그림자처럼 얼렁거렸다는 사실은 여러 정황으로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02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에 의해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송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터져 나왔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민심을 달랬지만 되레 수사 요구는 거세졌다. 노벨평화상과 국격 이야기가 오가며 두루뭉술하게 지나가던 사건의 진실은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불거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성골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북송금 특검법에 사인했고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남북정상 회담의 실무를 지휘한 박지원은 수사의 도마에 올랐다. 사람들은 잊고 있었고 박지원은 잊기를 바라고 있지만 햇볕의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밝혀진 사실은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대북 뒷거래가 있었다는 점과 그 실탄이 민간기업에서 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거래의 과정에서 추악한 뒷거래가 있었다는 정황이 전부였다. 이런 추악한 진실은 가려진 채 지난 2000년 6월 DJ와 김정일은 평양에서 악수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대북 퍼주기가 노골화되자 남북관계는 밀월을 만난 듯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김정일은 그때부터 영변에 진달래를 뽑고 약산을 허물어 핵개발의 가열찬 투쟁에 속도전을 펼쳤다. 청년시절 아비의 맹활약을 지켜본 김정은은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울린 리히터 규모 4의 진동을 감동처럼 가슴에 안고 진화한 버전으로 추억의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 뿌리에 박지원이 개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박지원은 그런 뒷거래의 주역 말고도 비리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 비자금 사건이다. 대북송금 프로젝트와 와중에 150억 원의 현찰이 실종됐다. 주인없이 허공을 떠돌던 돈은 주인을 찾는다고 공고까지 냈지만 결국 국고에 환수됐다.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수사 압박에 정몽헌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불행도 있었지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박지원은 징역 12년의 실형을 받고 구속됐다. 당시 이익치 전 현대증권 사장은 현대상선 정몽헌 회장에게 150억 원을 받아 김영완을 통해 박지원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고 김영완도 "돈의 주인은 박지원이고 나는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지만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 때만큼은 굳건히 입을 다문 박지원은 대법까지 가서 허공에 뜬 돈의 주인은 법원도 모르겠다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오래된 일이지만 그 당시 일설에는 붕대로 가린 애꾸눈이 형 집행을 이끌어냈다는 실없는 루머와 함께,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영화 '애꾸눈 잭'에는 결국 애꾸눈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전설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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