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으로 내려오기 싫었다. 하지만 이 땅을 밟고 다시 싸워보겠다”
철탑고공농성을 벌인 현대차 비정규직 출신 근로자 최병승씨와 천의봉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은 대형 크레인을 타고 땅을 밟았다. 두 농성자는 8일 오후 1시 20분을 기해 비정규직 노조의 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철탑농성을 해제했다. 철탑농성을 시작한지 296일만이었다.
최씨와 노조 관계자들의 부축을 받고 내려온 천 씨는 철탑에서 내려올 때부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땅위에서 다리가 아픈 듯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해제 직후 이들은 “경찰 조사를 받고 다시 투쟁하겠다”며 “수배자 신분이라 우선 경찰서로 간다, 우리가 경찰 조사를 받는 것처럼 현대차 역시 불법파견과 관련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승씨는 “10년 동안 진행된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마음으로 철탑에 올랐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며 “철탑에서 내려오기 싫었지만 땅에서 다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더 걸리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 사무국장은 “철탑 농성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데 10일이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1분밖에 안 걸려서 허무하다”며 “이제 농성자가 아닌 노조 사무국장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라 농성 해제 이후 경찰서로 이송됐다.
◆현대차 철탑농성, 사실상 ‘백기투항’
296일간의 철탑고공농성을 끝낸 최병승씨와 천의봉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철탑농성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불법파견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철탑농성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 노사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며 농성장을 내려온 한진중공업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는 달리 아무런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채 철탑을 내려온 것은 사실상의 ‘백기투항’이나 다름 없다는 평가다.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을 점거한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 2011년 11월 10일 노동계의 환영속에 크레인을 내려왔다.
한진중공업이 생산직 400명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자 ‘정리해고 반대’를 주장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이후 309일 만이었다. 당시 한진중공업 고공농성이 전국적 이슈로 부각됐고 정치권 인사들의 방문을 비롯해 수차례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향했다. 결국 노사는 정리해고자 94명을 1년내 재입사시키고 생계비 2,000만원 지급 및 고소 고발을 모두 취하하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노동계의 승리였다.
반면 현대차 철탑농성의 경우는 달랐다. 대선기간 동안 일부 정치인들이 철탑을 방문하며 이슈화를 끌어내는 듯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활발했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과 달리 현대차 희망버스는 노동계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폭력사태가 발생하며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한 모습이었다. 또 회사 측은 사내하청 근로자 3,50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해 하청노조의 명분이 밀리는 양상이었다. 실제 최근까지 1,500여명의 하청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도 현장 정서를 변화시켰다고 지역 노동계는 보고 있다.
◆여론 악화, 지도부 공백사태로 투쟁동력 상실
최병승, 천의봉씨의 철탑농성은 끝났지만, 사내하청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별협의는 희망버스 폭력사태 이후 잠정 중단된 상태다. 하청노조는 철탑농성이 해제된 8일 4시간 부분파업에 이어 오는 14일도 전면파업을 예고해 노사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하청노조가 특별협의를 통해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 또다시 파업을 계획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지적했다.
또 특별협의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현대차 정규직 노조(현대차 지부)와 하청노조와의 다소 소원한 관계도 사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지난해 12월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신규채용을 골자로 사측과 합의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하청노조가 지부 사무실을 점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당시 문용문 지부장은 “비정규직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다”며 밝혔고 특별협의가 파행을 겪기도 했다.
특히 지역 노동계는 이번 달 울산을 방문할 예정인 2차 희망버스가 노사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이는 철탑농성 해제 배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희망버스 폭력사태로 인해 하청노조 지도부가 와해됐고, 외부세력 개입이 오히려 노사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시각이다. 실제 폭력사태에 대한 경찰의 강경방침으로 박현제 지회장을 비롯한 노조 지도부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거나 구속이 이뤄져 지도부 공백사태로 이어졌다.
지역 노동계 전문가는 “철탑 농성 해제는 농성자의 건강 문제 이외에도 희망버스의 폭력사태로 인한 여론 악화와 지도부 와해 등 전반적으로 투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