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아들부부
일방적 이기적 인식
나와 다른 채식주의
고개 돌려버리는 세태
문학은 사회에 경종·각성
위안의 시간 갖게해
독자 스스로 갖고 구해야
독서 꼴찌 나라에서
오영수·한강 같은
훌륭한 소설가가
있다는것 소설처럼 신기

소설가 오영수 선생의 37주기를 맞았다. 내일 제24회 ‘오영수 문학상’ 시상식도 열린다. 선생의 주옥같은 단편소설 가운데 ‘화산댁이’가 생각나는 5월의 절정이 지나고 있다. ‘사랑의 달’ 5월 특히 어버이날을 보내고 소설 ‘화산댁이’가 기억에 남는다.
화산댁이는 경주에서 삼십리 떨어진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장가간지 삼년이 된, 경주에 살고 있는 출세한 아들이 보고싶어 아들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오랫만에 어머니를 만난 아들 부부는 화산댁이를 더러운 오물처럼 대했다.
그날 한밤중에 화산댁이는 화장실을 찾지 못해 하수를 흘려보내는 곳에 대변을 보고, 정원에 뿌리기 위해 담아 놓은 통 속에 물을 퍼서 내려보내곤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밖이 소란했다. 어젯밤 물로 씻어 내려보낸 대변이 옆집으로 흘러가 그 집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화산댁이는 황급히 달려가 옆집 하수로에서 대변을 담아 들고 집으로 와 버리려고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쓰레기통 안에는 어제 고향에서 가져와 손녀에게 준 도토리떡 뭉치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화산댁이는 얼른 떡 뭉치를 꺼내고 대변을 버린뒤 도토리 떡 뭉치를 들고 아들 집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화산댁이가 보고싶은 아들 집에 갔다가 겪은 참담한 일들은 아들 가족과 화산댁이의 서로 다른 성장과정과 삶의 형태가 빚은 처절한 갈등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식이 어머니의 삶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인식이 문제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관계가 사라지고 자신만이 장벽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주인공 영혜는 ‘육식하는 인간의 생존조건’이라는 상식에 맞섰다. 채식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상식의 반전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다.
햇빛과 물로만 살겠다는 식물화된 삶이 식물화된 영혜 삶의 목표다. 누군가에게는 더럽게 느껴질 지인의 어긋난 행동조차 미적행위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영혜가 상식 바깥에 존재해서다. 딸의 입을 강제로 벌여 탕수육을 쑤셔넣는 영혜의 아버지는 인간에게 가해진 폭압을 상징한다.
영혜를 이해하려는 언니 인혜의 보살핌은 인간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손길로 연결된다. 상식이 때로는 폭력일 수 있다는 명제를 소설은 남기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소설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조금 다르게 보이면 깎아내리려는 몰이해, 관계가 없으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무관심. 이처럼 타인에 대한 무지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법칙이 되고 말았다.
문학은 사회에 위안을 주고 경종과 각성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문학이 어떠한 무엇을 제공함이 아니라, 사회 곧 독자가 스스로 문학에서 자기가 구하고 싶은 바를 구하는 것이다.
문학은 태양이며 금강석이다. 우리는 그 불을, 그 빛을 각자의 욕구대로 역량대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스스로 우리에게 갖다바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문학의 특질일 것이다.
환란과 궁핍의 시대에도 그렇게 뚜렷하던 소설의 존재감은 이제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한 사회속에서 집없는 아이처럼 보이기에 이르렀다. 문학이 불필요할 만큼 완숙하고 풍요한 사회가 된 것일까, 아니면 문학을 떠올릴 여지조차 없이 미숙하고 황폐한 정신세계로 퇴행한 것일까.
일본 도쿄 도심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지바현 후나바시시 도요고등학교에서는 1988년부터 28년째 아침 독서운동을 펼치고 있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 8시 30분, 전교생이 10분간 침묵하고 책을 읽는다. 하루 10분만큼은 학교수업과 관련없는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는게 모두의 약속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서율 꼴찌라는 나라에서 주옥같은 단편소설작가가 나오고 세계적 문학상 수상작가가 나온 것이 마치 소설처럼 신기한 일이다.
